Blogcasting/우물쭈물 사는 이야기

경마장 가는 길

파란선인장 2014. 3. 26. 0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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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랜만에 만난 동생은 나와 함께 하고 싶은 일로 자동차 운전 연습을 말했다. 운전 연습은 그냥 학원가서 하는 것이 나도 좋고 동생도 좋은 일이겠지만 결과적으로는 기사노릇을 동생과 분담할 수 있을 것이고, 기분 전환 겸 바람쐬고 오는 것도 괜찮겠다 싶어서 그러자 했다. 다행히도 생각보다는 운전을 잘 해줘서 초반의 초조와 긴장은 시간이 지날수록 사라져갔다.

 

  우리의 목적지는 가덕도에 있는 등대까지 가는 것이었다. 시간상 한 시간 정도? 시내를 빠져나가면 그나마 차가 많이 다니지 않을 것 같았다. 원래는 거제도까지 가는 것이 목표였는데, 시간도 오래 걸리고 너무 먼 것 같아서 가는 길목인 가덕도까지만 가기로 한 것이다.


  가덕도에 들어설 때만 해도 상쾌한 기분이었다. 동생은 생각보다 운전을 잘해주었고, 바다와 부산 신항의 모습은 여행온 것 같은 신선한 설렘을 느끼게 해주었다. 그냥 계획없이 무작정 떠나왔을 때의 기분. 하지만 무작정 떠나온 자들에게 닥치는 시련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여행지에 관한 정보가 없다는 것이 가져다 주는 혼돈. 우린 등대로 향하고 있었는데 이상하게 자꾸만 산을 오르락내리락거렸고, 믿음직한 티맵이 알려준 길은 공사로 인한 폐쇄, 다른 길은 보수공사로 인한 카오스 상태. 정말 초보인 동생이 예기치 못한 오프로드와 산안주행에 급격히 운전 레벨이 오른 것이 수확이라면 수확. 결국 우린 군사제한구역으로 가는 길 앞[각주:1]에서 차를 돌릴 수 밖에 없었다. 동생은 운전하느라 정신없었고, 나는 티맵 검색하랴, 인터넷으로 가덕도에 관한 정보를 찾으랴, 다른 갈만 한 장소를 찾으랴 기력을 소모했다. 예상치 못한 상황과 이 상황을 파악하고 통제해야 한다는 부담감에 결국 뭣하나 제대로 하지 못하고 우리는 부랴부랴 가덕도를 빠져 나왔다.[각주:2]


가덕도야 미안해. 멍청한 우리가 우리 잘못은 모르고 막 욕하고 그랬어.ㅠㅠ


  멘붕의 섬이었던 가덕도를 빠져나와 지친 마음을 추스려서 다음 행선지를 정했다. 식당에 들려서 늦은 점심을 먹고 집으로 갈까 하다가, 예전부터 가고 싶어 했던 경마장으로 향했다. 동생이 예전에 경마공원에 갔던 적이 있었는데, 그때는 경주가 없어서 그냥 구경만 하고 나와 아쉬웠다고 해서 목적지로 정했다. 역시나 경마에 관한 배경지식이 전무했던 우리는 경주가 없을까봐 걱정했지만, 경마장 입구에서 반갑게 손을 흔들어주신 언니 덕에 안도할 수 있었다.[각주:3]


  입장료를 내고 들어서자 사람들이 몰려 있는 곳이 있었다. 그곳에서는 마권을 팔고 있었고, 사람들은 모니터와 정보지를 보면서 뭔가 분주해보였다. 둘 다 경마는 처음이라 일단 그곳에 들어갔다가 나왔다가 하면서 분위기를 살폈다. 바로 옆에서 팔고 있던 정보지를 사야할 것 같았지만, 재미로 온 우리에게는 너무 과한 것이 아닌가 해서, 마권을 살 때 쓰는 OMR용지를 몇 장 챙긴 뒤[각주:4], 안내소에 들렀다가, 관람대에 초보고객를 위한 안내소가 있다는 안내를 받았다. 설마 직접 경주를 보지 못하고 아까 그 곳에서 모니터만 보면서 경마를 해야하나 싶었다가, 역시 이렇게 큰데 그런게 없을리가 없다며 관람대에 입장하였다.


관람대 가는 길



  관람대 내부는 더욱 많은 사람들과 더욱 많은 마권판매대와 함께 편의점과 식당, 카페 등이 있어서 일단 급했던 식사를 할 수 있었다. 파파이스에서 무려 '경마장 세트'를 주문한 후, 다니면서 가져온 안내 팜플렛과 주운 정보지[각주:5]를 보며 어떻게 경마를 하는 것인지 파악해 보았다. 처음에는 뭐가 뭔지 몰랐는데, 설명을 자세히 보고 나니까 경기 방식이라던지, 마킹은 어떻게 하는 건지, 경기 방식에 따른 특성과 확률 등을 파악할 수 있어서 초보고객안내소에는 갈 필요가 없었다. 정보지를 보면서 우리의 기본적인 정보를 획득하고, 모니터를 통해 경주마들의 상태를 확인한 후, 우리는 각자 배팅을 했다. 각각 2개씩 복연승식으로 마권을 샀다. 경마에는 단승[각주:6], 연승[각주:7], 복승[각주:8], 쌍승[각주:9], 복연승[각주:10]식으로 배팅할 수 있는데, 복연승식이 확률상 적절하다 생각했기 때문이다. 


  되지도 않는 초짜 둘이서 앉아서 이 말은 어떻네, 저 말은 저렇네 하면서 말들을 재보다가 경기 시작 5분전에 마권을 샀다. 입에는 햄버거를 물고, 손에는 마권을 들고, 눈은 말들을 보면서 경주를 기다렸다. 말들이 출발선에 섰다. 출발신호가 나자 동시에 12마리의 말들이 뛰쳐 나왔다. 모니터로 보이던 말들이 코너 구간을 돌아나오면서 시야에 들어왔다. 말들이 보이기 시작하자 내부는 사람들의 흥분으로 가득차 여기 저기서 자신들이 건 말들의 번호와 응원이 넘쳐났다. 가까이 달려 올 수록, 힘차게 움직이는 말들의 근육이 보였고, 그 역동성에 완전히 매료될 수 밖에 없었다. 결승선에 다다를수록 사람들은 흥분했고 소리는 커져갔다. 그리고 이윽고―모든 행위의 절정이 그러하듯― 결승선을 통과하자 온갖 소리와 분위기는 삽시간에 사그라들어갔다. 장내는 사르라들어갔지만, 우리는 불타올랐다. 우리가 이겼기 때문이다.



으아아아! 빨리! 어서! 제발! 달려라 나의 말들아!!! 흐허헉!!!



  두 장씩 샀던, 총 네 장의 마권 중에 내가 배팅한 것이 유효했다. 3등 안에 든 말 중 두 마리를 맞춘 것이다. 최종 발표가 나기 전에 3등 안에 든 말의 부정행위에 관한 심사가 있어서 조마조마했지만, 결과적으로 문제없다는 판결이 나와서 그대로 인정이 되었다. 결국 내가 맞춘 것이다. 와, 그 쾌감이란! 경마의 신이 어리숙한 초보 하나 홀려서 나중에 홀랑 털어 먹으려는 수작이었을까, 아니면 초행자의 행운이었을까. 아무 것도 모르고 재미로 한 경기에서 이기니까, 아무 것도 아닌데 기분이 좋았다. 이래서들 도박을 하는 거구만. 배당률은 무려 6.5배. 낮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현실적인 배당률을 생각했을 때 매우 만족스러웠다. 우리는 경마의 신의 유혹에 홀려 다음 경주에도 마권을 구입[각주:11]했고,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 그냥 지고 말았다. 경주가 끝난 후 우리는 승리한 마권을 배당금으로 교환했다. 입장료 4000원+파파이스 경마장세트 14000원+커피 두 잔 7000원에 마권 구입비까지 더한 후 배당금으로 제하고 나니 우리는 총 23500원을 이 경마장에 쓰고 갔다.


  세상사가 다 그렇겠지만, 참 일이 안 풀린다 싶고 답답하고 그랬는데, 이 뜻하지 않은 행운이 나를 응원해 주었다. 경마장에 와서 딴 돈보다 쓴 돈이 더욱 많지만, 우리가 느꼈던 재미와 행운이 준 즐거움은 훨씬 값진 것일 것이다. 가덕도에서의 헤맴도 어쨌든 동생과의 추억이라 생각하면 재미있었던 일이어서, 전체적으로 오늘 있었던 일들은 즐거운 기억으로 남을 것 같다. 과한 의미부여일지 몰라도, 이렇게 청마의 해를 맞아 경마장에서 좋은 일이 생기니까, 또 1년 살아갈 힘이 나는 것도 같다. 뭐, 다시 한 번 더, 말처럼 달려 봐야겠다.



집으로 가는 길 - 돈은 땄지만 왠지 손해 본 것 같은 기분을 정신승리로 마무리하며 집으로 향하고 있다.





  1. 가덕도 등대는 군사제한구역에 속해 있어서, '부산지방청해양항만청'에서 미리 체험 신청을 해야 한다. [본문으로]
  2. 우리는 몰랐지만 가덕도에는 일제시대의 건물이 남아있는 마을과 포진지, 인공 동굴 등이 남아있고, 낚시 명소로도 유명하다. [본문으로]
  3. 경기는 금,토,일에 있다는 것 같았다. [본문으로]
  4. 이건 따로 챙길 필요가 없었다. 널리고 널린게 이 용지다. [본문으로]
  5. 정보지는 쉽게 주울 수 있었지만, 마킹용 사인펜은 절대 구할 수 없었다. 집에 널리고 널린게 컴퓨터용 사인펜인데, 결국 편의점에서 구입할 수 밖에 없었다. [본문으로]
  6. 1등 말을 맞추는 것. 1/10의 확률 [본문으로]
  7. 3등 안에 들어오는 말 한 마리를 맞추는 것. 3/10의 확률. [본문으로]
  8. 순위에 상관없이 1, 2 등의 말을 맞추는 것. 1/45의 확률. [본문으로]
  9. 1, 2 등의 말을 순서대로 맞추는 방식. 1/90의 확률. [본문으로]
  10. 3등 안의 말 두 마리를 순위에 상관없이 맞추는 방식. 1/15의 확률. [본문으로]
  11. 하지만 딱 하나 더 샀을 뿐이라고 하면, 비겁한 변명인가?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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