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왕 보는 거 음악과 함께 들어도 괜찮을 듯
여행의 시작
더 이상 단풍이 지기 전에 단풍놀이를 하고 싶다는 마음이 커져 갔지만 몸은 그에 맞춰 움직여 주지 않았다. 대장경과 단풍을 한 번에 해결할 수 있는 해인사 여행이 계획되었지만 생각보다 먼 거리에 시간부족 및 의지박약 등의 이유로 취소되어 버리고, 대신에 만나서 맛있는 거나 먹으러 가자던 약속마저 한 친구의 갑작스런 유럽여행으로 결렬되어 버렸다. 굳이 어딜 가야 단풍을 보나, 집 밖으로 조금만 나가도 볼 수 있는 게 단풍이거늘. 이런 생각도 들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단풍을 핑계로 바람 쐬러 어딘가를 다녀오자는 것이 내밀한 동기였기에 여행을 가야겠다는 마음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원래는 혼자 다녀올 생각이었는데, 해인사 행의 취소로 상심해있던 친구 ‘찬’과 함께 가게 되었다. 처음부터 순천을 여행지로 정한 건 아니었지만, 절과 같은 고즈넉한 곳에서 여유를 느끼며 고달픈 우리네 인생을 쓰다듬으며 궁극적으로 마음의 안정과 평안을 얻고자 하다 보니 절들로 여행지가 압축이 되었고 그 중에 가장 멀리 있는 송광사가 끌리고 있었다. 찬도 순천행에 긍정적이었는데, 송광사보다는 순천만에 대해 들은 바가 있어서였던 것 같다.
그렇게 목적지가 정해지고 일정과 동선을 짜기 시작했다. 원래는 당일치기 여행이어서 하루만에 송광사와 순천만을 돌아보려 했지만 거리상 거의 불가능 했다. 둘 중에 하나는 포기해야 했는데, 그렇게 할 수가 없어 1박2일로 일정을 늘리게 되었다. 첫날은 순천만을 둘러보고 둘째 날에는 송광사와 조계산 산행을 거쳐 선암사까지 구경하는 것으로 계획을 세웠다. 교통수단은 기차로 정했다. 물론 버스를 타면 더 빨리 도착할 수 있지만, 일정이 늘어나는 바람에 우리는 서두를 필요가 없었다. 오히려 여유있게 천천히 가는 것이 오히려 마음에 들었고 삭막한 우리네 삶에 기차여행으로라도 낭만을 보충시킬 필요가 있었다.
그 외에는 딱히 준비할 건 없었다. 동생이 대학교 때 갔던 답사에 순천이 포함되어 있어서 그때 만들었다는 답사집에서 송광사와 선암사에 대해 읽었고, 인터넷에서 송광사와 선암사, 순천만에 대해서 검색을 했다. 그리고 우리의 이동에 필요한 버스 노선 정도만 알아보는 것 정도가 여행가기 전에 했던 모든 일이었다. 다만 기차표 예매가 생각보다 힘들어 문제였다. 동반좌석 인터넷 예매를 못해서 출발 당일 아침에 현장에서 구입하기로 했는데, ‘찬’이 외출한 김에 구포역에 들러 예매를 함으로써 그 문제도 해결할 수 있게 되었다.
경전선은 경정경정 잘도 가네
구포역에서 아침 10시쯤에 만나 점심으로 먹을 김밥 세 줄을 샀다. 역 앞에서 먹을 걸 사려했던 나에 비해 찬은 각종 과일과 물까지 챙겨오는 세심함을 보였다. 너란 남잔…♡ 10시 40분쯤에 출발한 기차는 거의 4시간 후에 순천에 도착할 예정이었다. 출발 전에는 4시간이 길 것 같아서 뭐라도 보면서 가야겠다 싶었지만, 막상 타고 가다 보니 꼭 뭘 보지 않더라도 시간은 잘 갔다. 내 스마트폰 화면은 작은 편이어서 둘이 뭘 보기엔 불편했고 꼭 봐야 할 거라곤 소녀시대가 나온 스타 인생극장뿐이어서 그걸 본 이후에는 볼 것도 없었다. 오랜만의 여행이라 경치 구경만 해도 시간은 잘 갔고, 친한 친구와 함께 있으니 시간은 어떻게든 잘 흘러갔다. 산이 지날 때마다 단풍은 아직 붙어있는지 살피며, 하늘이 보일 때마다 오늘이나 내일 비는 오지 않을지 하나마나한 걱정을 하면서 흘러가는 경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평일에도 함께 1박2일의 여행을 다녀올 수 있는 하나 남은 친구 찬과도 이런저런 얘기를 하며 시간을 보내다 보니 그렇게 지루하지 않았다.
우리는 시시콜콜한 것부터 현재 맞닥뜨리고 있는 상황들에 대한 고민들에 이르기까지 방대한 분량의 대화를 쏟아내었다. 축구, 뿌리깊은 나무, 정치, FTA. 1시험, 취직. 어쩌다 우리는 이 지경에 이르렀는가에 대한 자기 성찰. 현재 상황에 대한 원인분석 겸 그럴싸한 핑계. 요사이의 심리상태. 조울증과 무기력증이라는 자가진단. 이 역경을 어떻게 이겨낼 것이며, 앞으로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 것인지에 대해. 하루 벌어 하루 먹는 삶에 대한 견해들. 부모님. 희망, 의지, 비전 따위의 식상하면서도 치명적인 것들에 대해 우리는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이런 이야기들이 쉽게 어디다 대놓고 툭 얘기할 수 있는 게 아니라서 그동안 쌓여있던 말못한 갑갑함이 어느 정도 해소되는 듯한 기분을 느끼기도 했다. 또 13년이란 기간 동안 알고 지낸 친구인데도 여전히 새로이 알게 된 부분들이 존재한다는 점도 신선했다. 반면에 예전에 내가 알던 점과는 사뭇 달라진 친구의 모습들을 보면서 어떤 씁쓸함 같은 것들도 느낄 수 있었다. 동시에 나와 많이 비슷한 모습을 발견하면서 슬픈 동질감을 맛보기도 했다. 그래... 니나… 내나…
순천만의 갈대밭
드디어 도착한 순천은 구름이 잔뜩 끼어 내 마음도 흐리게 만들었다. 순천만에 가는데 이렇게 흐려서야 일몰을 보겠나 싶어서 걱정이 됐던 것. 거기다 길지 않은 여행에 날씨가 이렇게 흐리면 흥도 나지 않기 때문이다. 순천역에서 내일 돌아갈 기차표를 미리 끊어 놓고 순천만 가는 버스를 기다렸다. 잘 몰랐는데 순천만이 꽤 주력 관광지인지 곳곳에 안내가 있어서 어렵지 않게 갈 수 있었다. 버스에 타니까 비로소 낯선 곳으로 여행을 왔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2. 시장 같은 곳을 지나면서 할머니들께서 많이 타셨는데 순식간에 버스 안이 왁자지껄한 전라도 본토 사투리로 가득하게 되었다.
흥미로운 일도 있었다. 한 할머니가 타면서 교통카드를 댄다고 댄 것이 찍히지 않고 넘어가서 기사아저씨가 다시 대시라고 했는데, 할머니께서 오해하시곤 계산했다고 버럭 하셨는데, 기사 아저씨는 또 거기에 별 반응 없이 계속 다시 대시라고 하고, 할머니는 계속 버럭 하시고. 상황을 파악한 주위의 다른 할머니들께서 그 할머니께 상황 설명을 해 주자 할머니는 쿨하게 다시 찍고 오시는 것이었다. 뭔가 당장이라도 엄청난 일이 일어날 것 같던 분위기가 한 순간에 아무 일도 없었던 듯(일말의 어색함도 못 느낄 정도로) 평온해 지는 것을 보면서, 이것이 말로만 듣던 전라도 아줌마들의 화끈함인가 하기도 했다.
순천만은 지리적 명칭이고, 우리가 도착한 곳은 순천만 자연생태공원이었다. 평일임에도 여러 대의 관광버스와 함께 적지 않은 사람들이 있는 것을 보고 이곳이 정말 유명한 곳이란 걸 다시 한번 느낄 수 있었다. 입장을 하면 자연생태관과 너른 잔디밭이 있고 그 뒤로 갈대밭으로 가는 길이 나있고, 순환열차와 선착장도 있었다. 그 뒤로 넓은 갈대밭과 바다로 나아가는 듯한 모습의 용산이 있고 용산의 머리 부분에 용산전망대가 있다. 일몰 시각을 염두 해 두면서 갈대밭 사이로 난 길을 다니며 주변 경치를 보며 사진도 찍어 댔다.
선착장으로 들어오는 배
이곳이 소설 ‘무진기행’의 배경이었다고 해서 그렇게 이름이 지어진 듯한 무진교를 지나면 갈대밭이 나타난다. 갈대밭은 습지에 갈대가 자라나 넓게 분포하며 이루어져 있었다. 넓게 탁 트인 곳에 있으니 답답했던 마음이 시원해지는 것을 느꼈다. 여기에는 각종 철새들이 쉬어가고, 농게와 짱뚱어도 이곳에 산다고 한다. 비록 우리는 짱뚱어와 농게는 보지 못했지만 여러 철새들은 볼 수가 있었다. V자를 그리며 날아가는 기러기 떼를 볼 때마다 어린 시절의 기억이 떠올라 정겨웠고, 이름을 알 수 없는 새들의 군무는 붉어지는 하늘과 어울려 아름다우면서도 경이로웠다.
순천만의 갈대밭.
갈대밭도 좋았지만, 우리가 제일 중점을 뒀던 것은 용산전망대에서의 일몰이었다. 그러기 위해선 하늘이 중요했다. 여전히 하늘은 구름이 많아 지는 해를 온전히 볼 수 있을지에 대해 걱정이 커져 갔다. 버스에서 내려 이곳에 도착했을 때도 제일 먼저 하늘을 확인했었다. 흐려질 대로 흐린 하늘을 보면서 간절한 기도까지 했었다. 온 하늘이 맑아지는 건 바라지도 않는다고. 다만 지는 해 주위만 좀 구름을 걷어줘서 해가 보이게만 해달라고. 구름 뒤로 해가 지는 일은 없게 해달라고. 그래서 구름만 보게 하지 말아달라고 하늘을 향해 빌기까지 했었다. 그런 간절한 마음을 품고 용산전망대로 향했다.
붉게 변해가는 서쪽하늘. 여전히 구름이 많아 걱정이었다.
갈대밭 길이 용산의 꼬리를 돌아 들어갈 때쯤이면 본격적으로 전망대로 가는 길이 시작된다. 산이라곤 하지만 남해안의 바닷가에 있어서인지 오르기 힘들지는 않았다. 처음에 한번 올라가면 그 뒤로는 능선을 타고 가는 길이라 쪼맨한 아이들도 다닐 정도다. 다만 처음에 갈림길이 있는데 거기서 ‘다리 아픈 길’을 선택하지 않으면 된다. 찬과 나는 시간이 여유롭지 않다는 생각에 조금이라도 빨리 도착하기 위해서, 또 우습지만 ‘남자아이가’하는 마음에 ‘다리 아픈 길’을 선택했다. 또 다른 길은 ‘명상의 길’이었던 것 같다. 그러니까 우리는 좀 더 빨리 가기 위해서 ‘다리 아픈 길’을 가파른 경사를 감내하며 오르고 또 올랐는데, 나중에 돌아올 때 ‘명상의 길’을 이용해 보니 실상은 그리 빨리 가는 것이 아니었다. 다리는 정말로 아팠고 그래서 힘들어서 좀 쉬다 보면 3 얼추 시간상 이득을 보는 건 없었다.
우리 뒤로 커플 한 쌍이 같이 올라왔는데, 가만 보니 기차에서부터 계속 같이 온 커플이었다. 4 아마도 남자는 모자로 가린 짧은 머리가 군인인 것 같았고 여자는 빨간 털모자를 썼었는데, 연인끼리 왜 ‘다리 아픈 길’로 올라오려 하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오붓이 손잡고 다정스레 걷기엔 누가 봐도 ‘명상의 길’이 나을 텐데. 얼핏 보니 여자는 싫다는데 남자가 적극적으로 선택한 것 같았다. 과연 그 남자의 마음은 무엇이었을까. 뭐 군인정신 같은 건가.
하늘은 서쪽에서부터 점점 노랗게 물들고 있었다. 그 빛을 받아 노란 갈대밭은 더욱 황금빛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이제 곧 일몰이 시작될 것 같았다.
무사히 일몰을 볼 수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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