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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천 여행?-3

파란선인장 2011. 12. 21. 1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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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암사

밤사이 비가 내렸지만 다행히 아침엔 갰다. 숙소에 붙어있는 식당에서 아침을 해결하고 짐을 챙겨 길을 나선 시각이 오전 10시쯤. 구름은 좀 있었지만 그런대로 날씨가 좋아 그때만 해도 즐거운 산행이 될 것 같았다.

아침으로 먹었던 돌솥비빔밥. 갓김치와 매실장아찌가 맛있었다.



어제 미리 끊어 놓은 기차시간이 17 05. 송광사에서 순천역까지 가는데 걸리는 시간을 고려했을 때 우리가 송광사에서 타야 할 마지막 버스의 출발 시간은 15 40. 여유롭다곤 할 수 없지만, 모자랄 것 같지도 않았다. 조계산 산행에 대해 검색해 본 바로는 대략 4시간 정도 걸린다니까 게으름피지만 않으면 시간상 문제되진 않을 것 같았다. 물론 좀 더 일찍 움직였다면 산행 후에 낙안 읍성도 구경할 수 있었을 텐데 그러지 못한다는 점은 아쉬웠다.

선암사 올라가는 길.



선암사 입구에서 표를 끊고 조계산 등산로 지도도 하나 받아 두었다. 선암사로 가다 보면 웬 돌다리 하나가 나타나는데 그것이 승선교다. 승선교는 보물로 지정된 문화재로 고려 때 만들어졌는데, 이 다리를 받치고 있는 기단에서 균열이 발견되어 얼마 전에 보수를 했다고 한다. 그래서 기단석은 새 돌인 티가 좀 났다. 모양은 아치형을 이루고 있고 규모도 꽤 있는 편이었다. 승선교 앞의 길가에 보수하면서 철거한 돌을 전시해놓고 있었고 그 위에 사람들이 돌을 쌓아 놓았다. 다리를 건너면 신선이 된다는 뜻에서 승선교(昇仙橋)라는데, 이미 신선 같은 삶을 살고 있는 나로선 이걸 건너야 하나 말아야 하나 잠시 고민도 했더랬다.

승선교


 

승선교를 지나 조금만 더 가면 선암사가 나오는데, 다른 절과는 달리 일주문이 소탈한 편이었다. 얼마 전에 법회가 있었는지 사찰 내에 연등이 달려 있어 약간은 어수선하기도 했다. 어디부터 돌아볼까 하는데 찬이 한 보살님께 화장실이 어디 있는지 물어봤다. 선암사에 들어오기 전에도 화장실은 있고 그때도 뭔가 고민하는 눈치였던 찬이 본격적으로 산에 오르기 전에 마지막으로 볼일을 볼 수 있는 곳이 선암사라고 생각해서인지 화장실에 들르기로 결심한 것이었다. 찬이 싸는 김에 나도 미리 싸놓고 등산하자는 생각에 선암사의 화장실을 이용하게 되었다.

선암사 일주문

 

아마도 얼마전에 법회가 있었던 듯하다.



자유와 해방의 행위의 공유

선암사의 화장실의 정식 명칭은 뒤ㅅ간이다. 조선시대 지어진 건물로 우리나라에서 화장실로는 유일하게 문화재로 지정된 유명한 화장실이었다. 보통 선암사를 찾는 관광객들은 구경삼아 들어와서 둘러보고 나간다는데, 우리는 거기에 실제로 똥을 싸러 들어간 것이다. 만약 관광객이 많았다면 엄두도 못냈겠지만, 다행이 사람이 없어 거사를 치를 수 있었다. 선암사 뒷간은 밖에서 봤을 때보다 안에 들어가면 그 규모의 거대함을 더욱 생생히 느낄 수 있다. 남자용과 여자용이 구분되어 있는데 놀랍게도 쪼그려 앉았을 때 머리 높이까지만 칸막이가 설치돼 있을 뿐 모든 공간이 다 뚫려 있어 실제로 남과 여가 이곳에서 같이 볼일을 볼 수 있을지 상당히 궁금했다. 같은 남자끼리도 이곳에서 똥을 싸기는 좀 어색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모든 것이 개방되어 있었다. 그리고 각 사로[각주:1]에는 문도 없어서 한참 집중하고 있을 때 자기 앞을 지나가는 누군가와 어색한 조우를 겪을 수도 있다. 그러기에 사람이 많을 때 여기서 똥을 싸게 된다면 가장 구석진 사로부터 채워나가는 시민의식이 필요할 것 같았다.


뒷간 혹은 깐뒤. 볼일 보느라 내부는 찍지 못했다.

 

사로에 들어가 자세를 잡을 때 네모난 구멍 아래로 보이는 뻘 같은 똥들이 시각적 충격을 줄 수도 있다. 그리고 꽤나 깊다는 생각이 꽤나 높은 곳에서 싸는구나 라는 생각으로 바뀔 때, 동시에 바닥의 나무가 삐그덕 하는 마찰음을 낼 때 어쩌면 다리가 후들거릴 수도 있다. 정신을 가다듬고 쪼그려 앉아서 똥을 밀어내는 데에 집중하고 있으면 나무 창살 너머로 보이는 바깥 풍경이 아까의 긴장을 잠시나마 누그러뜨려 줄 것이다. 그 누그러진 긴장은 이 창살이 매직미러도 아니고 여기서 저기가 보인다면 저기서도 여기가 보이겠구나 라고 깨닫는 순간 사라지고 항문에 더욱 팽팽한 긴장감을 선사해준다.[각주:2] 그런 이완과 긴장때문인지 배변은 무리없이 그리고 시원하게 보았다.

이 뒷간에서 똥싼 경험은 인생에서 가장 흥미진진하고 새로운 것이었다. 양적으로 많고 질적으로 다양한 똥들에도 냄새는 전혀 나지 않았고, 까 논 엉덩이골 사이에는 시원한 바람이 불어올 정도로 환기시스템이 훌륭했다. 내가 군대에 있을 때 우리 중대 화장실이 이런 푸세식이었는데, 그 화장실에 비하면 이곳은 육군본부수준의 화장실이다. 까기 전에는 과연 이곳에서 할 수 있겠는가 하는 생각이 깐 뒤에는 과연 이곳만한 화장실이 있겠는가로 바뀌었다.

그런 화장실에서 나와 찬은 단 둘이 똥을 쌌다. 서로의 똥이 나오기 전 자신의 탈출을 알리는 예비음이 각자 어떻게 다르지 확인했다. 우리는 자유낙하 후에 들려오는 서로의 파열음을 공유했다. 그 넓은 공간에서 단둘만의 똥타임을 통해 우리는 함께 똥까지 눴다는 미묘한 공동체 의식의 형성으로 서로가 좀더 가까워졌음을 느꼈다.

시원하게 볼일을 보고 본격적으로 선암사를 둘러 봤다. 약수도 마시고 나중에 마시기 위해서 물병에 담아 두었다. 이 물이 뒤에 있을 산행에서 생명수와 같은 역할을 했다. 그리고 연못에 있는 돌에 동전을 던지며 소원을 빌기도 했다. 정말 오랜만에 동전을 연못 가운데 있는 돌 위에 안착시키는 쾌거를 이루기도

여기서 우리는 생명수를 얻을 수 있었다.


누워있는 것 같다해서 와송이라 불리는 소나무. 어쩌다 저렇게 자랐을까 생각하다가 이래서 유명해지고 더 보살핌을 받는 거 아닐까라는 생각도 들었다.



대웅전을 기대했었는데 대웅전 앞마당에 연등이 설치되어 있어서 전체적인 모습을 볼 수 없었던 것이 많이 아쉬웠다. 대신에 대웅전 안에서 붉은색 가사를 걸치신 스님께서 불경을 외고 계셨는데, 왠지 익숙할 것 같은 그 모습이 너무 오랜만이라 그런지 새로운 느낌이었다. “전라남도 순천 선암사…” 까지만 알아 들을 수 있었지만 한동안 그 앞에서 불경을 듣고 있었다.



대웅전 뒤로 매화나무가 심어져 있는 길이 있었다. 지금은 나뭇잎 하나 남아 있지 않았지만 봄이 되면 예쁜 풍경을 이룰 것 같았다. 선암사는 봄에 가장 아름답다고 하는 말은 이 나무들에서 필 매화 때문일 것이다. 선암사는 다른 절과 다르게 산의 경사를 그대로 이용해서 계단식으로 건물을 지어 놓아 산 속에 안긴 느낌이었다. 그리고 곳곳에 나무가 많아 봄이면 매화뿐만 아니라 다른 여러 꽃들도 피어서 절 자체로도 아름답고, 또 주위의 경관과도 조화를 이룰 것 같아 언젠간 봄에 다시 찾아야겠다고 다짐했었다.

여러 건물들 가운데 팔상전이라는 곳을 들어가 보았다. 팔상전은 부처의 여덟 전생의 모습을 그린 그림을 모셔놓은 곳인데, 예전에 주워들었던 부처의 전생을 그림에서 찾아 볼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들어가 봤다. 얄팍한 지식에 알아볼 수 있는 장면은 거의 없었고, 딱 한 장면 정도는 대강 어떤 이야기에서 나왔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밖에서는 몰랐는데 들어가보니 할머니 한 분이 계셨다. 우리를 보시고는 어디서 왔는지 뭐하는 사람인지 등을 물어보시고는 절하고 시주하면 공부 잘 할거라고 하시고는 나가셨다. 절 한번 하는데 많은 시간과 노력이 드는 것도 아니고 이왕에 여기까지 왔으니 절이라도 하고 가자 싶어 절을 했다. 적은 돈이라도 시주를 할까 하다가 물론 정성어린 마음도 중요하지만 뭔가를 이루기 위해서는 자기 하기 나름이라고 최근 몇 년간 깨달은 바를 핑계로 절만 하고 나왔다.

그렇게 선암사에서 한 시간 정도 있었다. 버스 시간까지는 4시간 정도 남았다. 순천에 오기 전에 어떤 블로그에서 본 바에 따르면 조계산은 산이 험하지 않고, 길이 부드러워 누구나 쉽고 편안하게 산행을 즐길 수 있다는 글을 봤었다. 그리고 전라도의 산이 주는 부드럽고 완만한 이미지에 혹해 장군봉(조계산 정상)에 갔다가 보리밥집으로 가기로 했다. 이왕 산 타는 거 정상에 갔다가 오는 게 좋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게 고난의 행군이 되리라곤 그때까진 몰랐었다.


 

선암사

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고 선암사로 가라
선암사 해우소로 가서 실컷 울어라
해우소에 쭈그리고 앉아 울고 있으면
죽은 소나무 뿌리가 기어다니고
목어가 푸른 하늘을 날아다닌다
풀잎들이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아주고
새들이 가슴 속으로 날아와 종소리를 울린다
눈물이 나면 걸어서라도 선암사로 가라
선암사 해우소 앞
등 굽은 소나무에 기대어 통곡하라

-정호승,<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라>中.

 

 이 시는 선암사에 갔다 온 후에 알게 되었는데, 미리 알고 갔더라면 더 좋지 않았을까 싶다. 다시 눈물이 날 때 기차를 타고 선암사로 가서 그때는 해우소에서 쭈그리고 앉아 똥을 싸는 대신 울어봐야겠다.

 

 

  1. 군필자들은 이해할 수 있을텐데, 화장실의 각 칸을 군대에서는 ‘1사로, 2사로’와 같이 불렀었다. [본문으로]
  2. 실제로 밖에서는 안이 잘 보이지 않는다고.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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