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ogcasting/우물쭈물 사는 이야기

선생님도 학교탈출을 꿈꾼다

파란선인장 2020. 7. 6. 1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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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글은 소속학교 도서부 문집에 여는 글로 작성했던 글을 옮긴 것입니다.

 

 

  학교에만 오면 몸이 아픈 아이들이 있다. 학교에서 이 아이들은 무기력하고 만사가 귀찮으며 시름시름 앓기 시작한다. 수업시간에는 엎드려 버티다가 학년실 문을 열고 들어와 담임 선생님을 찾으며 조퇴 각을 살핀다. 담임 선생님은 이런 저런 약을 처방하려 하지만 아이는 부모님과의 통화를 원한다. 얼마 후 가방을 메고 학교 건물을 나가는 아이의 뒷모습은 어딘지 모르게 가벼워 보인다.

  수업시간에 매일 자는 아이가 있었다. 자습을 했던 어느 날, 교실 앞자리에 앉아 있는 몇몇 오타쿠 학생들과 애니메이션에 대해서 얘기를 하는 중이었다. 내가 어떤 애니에 대해서 아는 척을 좀 했는데, 잘못 알고 있는 정보가 있었다.[1] 거의 대부분의 수업 시간을 엎드려 자던, 자습이라고 예외가 있을 리 없던 아이가 갑자기 상체를 일으키며, 안경을 치켜 쓰며, 안경알 너머로 눈을 반짝이며 선생님 그건 아닙니다, 니코니코니는……이라며 또렷한 음성과 단호한 표정으로 나의 오개념을 바로 잡아주었다. 그날 나는 그 아이의 목소리를 처음 들을 수 있었다.

  역시 항상 엎드려 있는 아이가 있었다. 그 반에는 그 아이와 비슷하게 생긴 아이가 한 명 더 있었는데, 둘 다 항상 엎드려 있어서 2학기가 돼도 그 아이들의 이름이 헷갈리곤 했다. 수학여행을 함께 갔는데, 매일 엎드려 있던 그 아이가 수학여행 동안에 친구들의 다양한 모습을 카메라에 담으려 애쓰는 모습을 보았다. 너무 그 아이만 고생하는 것 같아서 너도 다른 친구들과 사진도 찍고 좀 쉬라고 했는데, 괜찮다며 자기가 재미있어서 한다고 대답하는 아이의 눈은 생기가 흐르고 있었다. 그 이후로는 그 아이의 이름이 헷갈리지 않았다.

  학교에서만 벗어나면 아이들이 살아났다. 작년 인문학 기행 중 연극을 관람했던 소극장에서 아이들은 배우와 함께 한 편의 연극을 완성했다. 연극의 무대를 소극장의 전체 공간으로 넓히고 이야기의 주체를 배우에서 관객으로 확장시키는 데에 우리 아이들의 공이 매우 컸다. 수학여행 동안에도 제주도의 이곳 저곳을 즐기고 친구들과 어울리며 아이들은 자신들의 원래 표정으로 웃고 있었다. 학교 밖에서 만난 아이들은 오롯이 자기 자신으로서 밝고 건강하고 유쾌하며 사랑스러웠다.

  다시 돌아온 학교에서 아이들은 다시 엎드리고 조퇴 각을 보고 있다. 잔뜩 찡그린 얼굴로 학년실 문을 열고 들어 온다. 아프냐? 나도 아프다. 선생님도 아프다. 선생님도 교무실 문을 열고 잔뜩 찡그린 얼굴로 교감선생님께 가서 조퇴 각을 보고 싶다. 나도 가벼운 뒷모습으로 학교 밖으로 나가 밝고 건강하고 유쾌하게 본래의 표정으로 웃고 싶다.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는 누구나 지루함과 답답함을 느낀다. 어제와 같은 오늘이 내일도 반복될 것이라는 것을 알 때, 그리고 그 시간과 공간 속에서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을 발견하지 못할 때 무기력함과 귀찮음에 빠지게 된다. 교사라고 해서 끄떡없는 것이 아니다. 교사도 마찬가지다. 방학은 학생보다 교사가 더 간절하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사이기 때문에 애니메이션과 수학여행과 연극관람과 학교 사이의 어느 지점을 생각해보고자 한다. 우리가 본래의 모습으로 만나는 장소가 학교가 될 순 없을까.

  도서부의 첫번째 문집의 주제로 학교 탈출이 선정되었다. 이 문집에는 학교 탈출을 꿈꿨거나 시도해 본 아이들의 생각이 담겨있다. 조금은 서툴고 그래서 귀엽고 때로는 발칙한 아이들의 글들을 보면서 학교에 대한 아이들의 속마음을 어느 정도 짐작해 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열심히 글을 써준 아이들에 비해 지도교사의 역량이 부족해 여러모로 부끄럽고 미안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금 욕심을 내어 학생들에게는 즐거운 공감의 경험을, 선생님들에게는 조금이나마 학생들을 이해할 수 있는 경험을 제공해 줄 수 있기를 희망해 본다. 그래서 언젠가 학교가 아이들에게 탈출해야 하는 곳이 아닌 탈출구가 되길 바라 본다.

 


[1] 나는 오타쿠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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