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송정 |
12시가 조금 지난 크리스마스의 정오. 동래의 어느 후미진 골목길에서 남자 셋이 모여있다. C와 H가 먼저 와 있었고, K가 마지막으로 도착을 했다. 그들은 간단히 인사를 하고 C의 차를 타고 송정으로 향했다.
그들은 고등학교 동창이다. H는 서울에서 일을 하다 휴일을 맞아 오랜만에 부산으로 내려왔다. 크리스마스에 남자 셋이서 만나서 청승맞게 바닷가를 간다기 보다는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와 바람을 쐬러 가는 것일 뿐이라고, K는 생각했다. 전날 '만나서 어디가서 무얼하나'라는 카톡 대화 중에 부산에서 갈 만한 곳을 리스트로 제시했던 K였다. K는 단순 나열이라고 생각했지만, 누군가는 그것을 이동의 순서로 이해를 했다. 그 리스트의 가장 위에 제시되었던 곳이 송정이었고, 다음이 해운대였을 뿐이었다. 어쨌든 송정으로 향하는 것에 불만은 없었다. 그저 바람을 쐴 수 있다면―그것이 차가운 겨울바다의 바람일지라도 상관없었다. 다만 그러한 이유일 뿐이지, 이것이 크리스마스에 딱히 할 일이 없는 장정 셋의 청승은 아니라고 K는 고개를 저으며 생각했다.
송정은 정말로 오랜만이었다. 대학 시절에는 이들을 포함한 많은 친구들과 함께 오기도 했고, 대학 엠티로도 자주 오던 곳이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지 굳이 송정까지 가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렇게 기억 저편에서 잊고 있던 장소였는데, 최근에 많이 변했다는 소식을 들어 언젠가 한 번은 가봐야겠다고 생각했던 것이었다. 그런 이유로 K는 송정을 리스트의 가장 위에 올렸던 것이다. 강산이 한 번 바뀌었을 시간이었다. 그 시간 동안 어느새 C는 자가 운전자가 되어있었다. 그의 차를 타고 송정으로 향한다는 사실이 K는 감회가 새로웠다.
바다는 그대로였다. 하지만 사람이 지은 건물들은 달라져 있었다. 카페가 많이 생긴 것 같았다. 예전에는 없었던 서핑을 가르치는 곳도 새로 생긴 건물들 중 하나였다. 1 송정에 갓 도착했을 때 K는 바닷가에서 잠수복을 입고 있는 사람들이 해녀들이라고 생각했다. 예전에는 항상 저녁에 와서 아침에 떠나서 보지 못했던 것이었나 했지만, 그 서핑 건물을 본 후 그녀들이 서핑을 배우는 중임을 알게 된 것이다.
사라진 건물도 있었다. 송정역에서 기차를 탄 기억은 없지만, 몇 번 스쳐갔던 기억은 있다. 건물은 그대로지만 역사(驛舍)로서의 기능은 사라졌다. 이제는 문화재로 지정되어 기념 사진을 찍거나 연인들의 데이트 장소로 활용되는 듯 했다. 한번 들를까 했지만, 왠지 그들과는 상관없는 장소인 것 같았다. 그들이 탄 차는 송정역을 빠르게 지나쳐 송정 바닷가 근처 주차장에 멈췄다.
휴일이어서인지 주차할 곳을 찾기가 어려웠다. 가까스로 차를 댄 후, 송정 바다를 바라보았다. 이곳이 송정임을 증명하듯 모래사장의 한 쪽 끝에 자리잡은 송림은 여전히 그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많이 변한 건물들과 예전 모습 그대로인 자연을 보면서 자연은 의구한데 변하는 건 인간사라는 감상에 젖을 찰나도 없이, 그들은 밥집을 찾아 나섰다. 송정까지 오면서 K는 나름 송정의 맛집을 찾았지만, 기껏 찾아간 곳은 그가 찾던 그 맛집이 아니었다. 그렇게 그들은 백사장의 한쪽 끝에서 다른 쪽 끝으로 이동을 해야 했다. 이동 중에 여러 식당을 눈여겨 보면서 1차 목적지인 어떤 국수집으로 향했다. K는 자신의 실수로 뜻 밖의 밥집 여정을 떠나게 된 것이 내심 무안했다. 그래서 오히려 어제처럼 선택지는 내가 제시해 줄 테니까 선택은 너희 둘이 결정을 하라고 역정을 내기도 했다. 하지만, K는 자신의 친구들의 우유부단함을 잘 알고 있었다. 언제나 선택을 해야할 때면 장소를 불문하고, 인원이 몇 명이든 그들은 둥글게 서서 결정을 미루며 수시로 이야기가 옆길로 빠지는 것을 방관하는 습성이 있음을 K는 이미 잘 알고 있었다. 으휴 이 우유부단한 새끼들, 이라고 K는 내뱉었다. 물론 이 '새끼들'에는 K 자신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렇게 산책 겸 백사장 이면 도로를 걸어 유명하다는 국수집에 도착을 했다. 유명세에 걸맞게 그 집 국수와 그들이 입을 맞추기 위해서는 한 시간 이상을 기다려야 했다. 그냥 돌아가기는 아쉬워 K는 이것저것 알아보며 둘러 봤지만, 뾰족한 수는 없었다. K는 고민했다. 기다려야 하는가 포기해야 하는가. C와 H는 빨리 포기를 했다. C와 H의 표정을 본 후 K도 곧 포기의사를 표시했다. 그들은 다른 식당으로 향했다. K는 이럴 때는 빠르게 결정을 내린다고, C와 H를 한번 흘낏 쳐다보며 아쉬움 속에서 훗날을 기약했다.
그 국수집 아래에 나름 분위기가 좋아 보이는 식당이 있었고, 이번에는 20분만에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그곳은 식당과 민박, 서핑까지 같이 하는 곳 같았다. 나름 하와이안 퓨전 레스토랑 같다고 K는 자체적으로 그곳에 대해 정의를 내렸다. 그곳에서 스페셜버거와 볶음밥 종류의 음식과 샐러드 중 하나를 고르고, 거기에 파인애플 주스와 레몬에이드 한 잔을 주문했다. 물론 이러한 결정을 내리기에도 많은 의견교환이 있었지만, 이제는 그냥 생략하기로 한다. 파인애플 주스는 기본이 2인분이었기에, 레몬에이드 한 잔을 더 주문하기로 했는데, 파인애플 주스 하나로도 셋이서 충분히 먹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K는 자신의 선택을 조금 후회했다고 한다.
셋이서도 충분한 파인애플 주스와 잉여로운 레몬에이드
그 식당에 남자들끼리만, 그것도 셋이나 함께 온 무리는 그들이 유일했다. 그들을 제외하고는 모두 남녀 한쌍의 음양의 조화가 잘 이루어진 무리들이 맛있게 식사를 하고 있었다. K는 이미 이런 상황에 익숙했다. 타인의 시선따위는 이미 신경쓰지 않는다고 믿고 있었다. 마음 한 켠에서 자꾸 들리는 '오늘은 크리스마스야'라는 목소리도 간단히 제압할 수 있다고 자신했다. 어차피 시간은 많고, 평소보다 높은 식대를 지급하고 먹는 식사이니 만큼, 최대한 여유롭게 이 상황을 즐기면서 먹겠노라고 다짐했지만, K의 입과 손은 머리보다 빨랐다. 의식적으로 여유롭게 식사를 하고자 노력했지만, 무의식은 급했던 것 같다고, 식당을 나오며 K는 자신의 식사를 조용히 자평했다.
그들은 송정에는 경치가 좋은 카페가 많다는 것을 인터넷 조사와 풍문으로 들어 알고 있었다. 식당을 나와서 조금 더 이동하면 테라스에서 편하게 앉아 바다를 감상하면서 커피를 마실 수 있을 것 같은 카페 건물이 보였다. 하지만 그곳으로 가면 주차해 놓은 차와 더 멀어지게 된다는 사실이 걸렸다. C는 자신이 가서 차를 가지고 오겠다고 했다. K와 H는 잠깐 그것이 합당하고 편한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이왕 가는 거 함께 가자고 의견을 모았다. 거기에는 소화라는 명분을 붙였고, 셋이 함께 가서 함께 차를 타고 다시 돌아온다라는 훈훈한 해결책도 있었다.
얼마 후, 그들은 C의 차가 있는 곳까지 왔고, 그대로 근처에 있는 카페에 들어가서 커피를 마셨다. K는 그것이 귀찮음 때문이었는지, 망각이었는지 확실하지 않다고 했다. 아마도 그 둘 다 해당됐을 것이라고 했다. 아마도 막상 도착해보니 굳이 그 테라스가 있는 카페까지 가야하는가에 의문이 생기지 않았을까 추측해 볼 뿐이다. 카페 2층의 테라스―원래 가려던 곳 보다는 좁았지만―에 앉아서 커피를 마시며 한참을 송정 앞바다를 본 후, 그들은 송정을 떠나기로 했다.
커피 마시면서 바라본 송정해수욕장. 용량의 압박으로 화질의 열화가 심한 점은 양해를ㅜㅜ
2. 용궁사 |
송정을 빠져 나와 해운대로 가려다 셋은 용궁사로 향했다. 용궁사는 송정 근처에 위치한 관음사찰로 차로 5분밖에 걸리지 않는다. 백사장의 이면도로 위를 이동하면서 회전교차로에 다다를 때까지 셋은 용궁사에 갈 것인지를 결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이 최초의 리스트에 없었던 용궁사로 간 것은 순간의 충동에 의한 것이었다. 회전교차로에 진입하는 순간까지 어쩌지를 남발하고 있었고, 결국 운전대를 잡은 C의 과감한 결단으로 인해 그들은 용궁사로 향하게 된 것이다. 교차로를 돌 때 급박하고 초조했던 마음은 용궁사로 향하는 도로에 들어섰을 때에는 평화로 가득해져 있었다. 이미 돌이킬 수 없다는 사실이, 돌아가려면 어차피 용궁사에서 차를 돌려야 한다는 것이 셋의 마음에 평화를 가져왔다. K는 크리스마스에 절에 가는 정신나간 사람들은 우리 밖에 없을 거라고 농을 쳤다. 하지만 용궁사로 가려는 차량들이 만든 긴 줄의 꼬리에서 입장을 기다릴 때, K는 크리스마스에 절에 가기 위해서 기다려야 한다는 사실에 놀라워 해야 할지, 우리가 그렇게 정신나간 사람은 아니라는 사실에 안도해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주차장에 차를 대고, 숨겨진 길 같은 샛길을 지나 거대한 탑이 있는 곳으로 나왔다. 그 탑의 첫인상이 예전에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본 고려 시기의 탑과 비슷하다고 생각한 K는, 이전에 용궁사에 한 번 온 적이 있는 C가 들려준 탑에 대한 설명을 처음에는 쉽게 받아들이기 힘들었다고 했다. '교통안전기원탑'이라는 이 8층 석탑이 그 기원의 내용이 낯설고 어색해 웃음이 나오기도 했는데, 다시 가만히 생각해보니 자못 현대사회에 필요한 기원탑이 아닌가 싶은 생각도 생겼다고 했다.
사실 생각해보면 어느 한 곳에는 이런 탑이 있어야 할 것 같다.
탑을 지나고 일주문을 지나고 '백팔장수계단'을 지나니 법당으로 향하는 다리가 있었다. 원래 있던 다리는 공사중이었고, 그 옆으로 임시적으로 다리가 가설되어 있었다. 그것을 보고 C는 매우 아쉬워했는데, 이 다리가 나름 유명해서 다리에서 연못 가운데 있는 그릇 모양의 조형물에 동전을 넣으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말이 있다고 설명을 해주었다. H가 나머지 둘에게 동전을 하나씩 나눠 주었다. K는 임시로 설치된 다리 위에서 동전을 던지고 있는 사람들을 구경하며 동전을 만지작 거렸다. 마침 옆에 있던 커플의 남성이 동전을 던질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는 아깝게 실패를 했는데, 그와 동전 그릇을 관찰하던 K는 이상하게 자신은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K는 천천히 심호흡을 하며 착지점까지의 거리를 가늠하며 가상의 시뮬레이션을 그려본 후, 천천히 하지만 확신에 찬 손놀림으로 동전을 던졌다. K의 손을 떠난 동전은 아름다운 포물선을 그렸고, 맑고 고운 퐁당 소리와 솟구치는 작은 물기둥, 아까 그 커플 중 여성의 짧은 감탄사를 남기며 정가운데에 착지를 했다. K는 마치 끝내기 홈런을 친 4번 타자처럼 양 손을 들고 그의 친구들과 놀라움과 기쁨을 나누었다. 이러한 일이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 K는 왠지 일이 잘 풀릴것 같다고, 별거 아니지만 참으로 기분이 좋고 신기했다고 했다.
저기 동자승 같은 사람이 들고 있는 바구니에 동전 넣기!! 예전에 비하면 많이 가까워졌지만 쉽게 넣기는 힘들다고 한다.
수평선이 석양에 물들고 있다.
용궁사 앞바다
용궁사의 이곳 저곳을 구경한 후, 해운대로 넘어가기 위해 주차장으로 돌아왔다. 해운대에 있는 피자집에서 저녁을 먹기로 정하고, 미리 예약을 해야하나 하며 차에 올라 탔다. 그들이 차를 탄 시각은 오후 5시 30분 쯤으로 늦어도 6시 30분에는 해운대의 그 피자집에 도착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들은 6시 30분에도 여전히 용궁사의 주차장이었다고 한다. 집으로 돌아가려는 인파가 몰려 엉망진창인 주차장에서 그들은 한 시간이 넘도록 갇힌 채 어찌할 바를 몰라하다가 나중에는 그냥 차에서 지난 주 라디오스타를 보는 등 그 상황을 즐기기도 했다고 한다. 그렇게 평소 10분이면 가는 송정에 위치한 아울렛까지 2시간이 걸렸고, 이후 거리상 더 멀었던 해운대의 피자집까지는 30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그들은 주차장의 차 안에서 달이 뜨는 것까지 보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용궁사에서 달뜨는 것까지 볼 걸이라며 K는 투덜댔지만, 이럴 줄 모르는 게 인생사임을...
3. 해운대, 그리고 다시 동래 |
힘겹게 도착한 피자집은 이탈리아 피자 브랜드인데, 미국의 전 대통령인 빌 클린턴이 좋아한 피자가게여서 대통령의 피자라고 불리는 집이었다. 여기에는 특이하게 기름에 튀긴 피자가 있었다. 피자 도우에 토핑을 한 후 반으로 접어서 튀긴 피자였다. K는 생전 처음 보는 피자의 모습과 그 방식에 흥미와 호기심이 생겼었다. 한껏 부풀어 오른 피자에 포크로 살짝 구멍을 낸 후 칼로 썰어서 한 조각씩 먹었다고 했다. 꽤 맛이 있다고 생각했지만, 가성비가 그렇게 훌륭하진 않은 것 같다고 K는 생각했다. C와 H도 크게 내색은 안 했지만, 아마도 비슷한 생각을 했을 것이라고 했다. 그래도 처음에 주문한 메뉴가 재료가 떨어져서 대신에 그보다 조금 더 비싼 샐러드로 바꿔준 사장님의 따뜻함이 여기까지 오는 데 겪은 고생을 잊게 해주는 데 충분했다고. 그래서인지 그 샐러드도 참 맛있었다고 한다.
튀긴 피자
업그레이드된 샐러드
딱히 해운대에서 할 것이 없다고 생각한 그들은 다시 동래로 돌아왔다. 가볍게 맥주를 한 잔 하기로 하고, 최근에 생긴 것 같은 한 수제 맥주집에 자리를 잡았다. 맥주를 고르면서 K와 H가 서로 조금 눈치 작전을 폈는데, 서로 겹치지 않으면서 맛있는 맥주를 먼저 시키기 위함이었다. C는 운전을 해야해서 고민없이 가게의 유일한 비알콜 음료였던 커피를 골랐고, H는 어떤 대회에서 1등을 했다는 흑맥주를, K는 또다른 흑맥주를 마셨다. 맥주의 맛이 꽤나 괜찮아서 이후에도 여러 가지 다른 맥주를 마시며 아직도 남아 있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때 셋은 함께 해외여행을 가자는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었고, 구체적인 목적지와 가서 무엇을 할 것인지, 언제 갈 것인지 등을 이야기했다. 비록 개인적인 사정으로 K는 같이 갈 수 없었지만, C와 H는 얼마 뒤 랑카위라는 곳으로 여행을 다녀왔다고 한다.
여러 가지 맥주와 안주
오후 12시 좀 넘은 시간에 만났던 이들 셋은 오전 12시가 조금 넘은 시간에 헤어져 집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p.s. 돌이켜 생각해보니 C와 H는 중요한 순간(?)에는 결정을 잘 내린 반면에 자신이 가장 우유부단했다며, K가 반성했었다는 사실을 알린다.
- 이러한 건물들이 최근에 생긴 것이라기 보다는 오랜만에 이곳을 방문한 사람의 생각임을 이해해주기 바란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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