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위 남천고택에서의 1박2일-첫째 날

2013.02.27 12:32


함께 쉬고 오기

  휴식의 시간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하는 시간을 가져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가능하다면 딱히 뭘 하지 않아도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좋은 사람들과 하룻밤이나마 쉬고 온다면 꽤 괜찮겠다고 생각했다. 처음에는 고등학교때부터 지금까지 친구라는 이름으로 내 옆에 있는 사람들과 오랜만에 다함께 하는 여행을 생각했다. 하지만 거의 다 여건이 안되어서 나와 서울에서 일하는 승관이와 둘이서만 함께 가기로 했다. 조금은 아쉬웠지만 오히려 둘이라서 조촐하게나마 더 편안히 쉬었다 올 수 있을거라는 기대도 되었다. 오히려 그런 것보다는 승관이와 나의 출발지가 서로 너무 멀어서 장소를 고르기가 어려운 것이 더 골치 아픈 문제였다. 태백산에 가자는 승관이의 제안을 물리치고 정한 장소는 경북 군위에 있는 남천고택. 예전부터 한옥 고택에 가서 쉬다 오고 싶은 마음이 있었는데, '1박2일'에서 방송되는 것을 보고서 염두에 두고 있던 걸 이번에 가보면 좋겠다 싶었다. 교통편이 좀 불편하긴 했지만, 이번 기회에 꼭 가보고 싶어서 내 의견을 좀더 내세웠고 승관이도 흔쾌히 동의해 주어 드디어 가게 된 것이다.




군위에 도착

  버스로 대구에 도착하고 다시 북대구시외버스터미널에서 군위로 가는 버스를 탔다. 한 시간 정도 지나서 2시쯤에 군위에 도착했다. 서울에서 군위까지 오는 시외버스가 있어서 그걸 타고 온다는 승관이는 4시에 도착할 예정이었다. 동서울에서 버스만 타면 되는 승관이와 달리 나는 여러 곳을 거쳐서 와야했기에 혹 늦는 것보다는 좀 기다리는 셈 치더라도 일찍 출발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다. 혼자서 가지는 시간을 즐기며 여유롭게 움직였지만, 군위에 도착한 후 막상 두 시간을 기다리려니 심심했다. 혼자 올라 올 때는 여행자의 들뜸과 낯선 곳이 주는 상쾌함으로 기분이 좋았었다. 시간적으로 여유가 있었기에 대구 관문시장에서 구경도 하고, '수수부꾸미'란 것도 먹어보며 여행의 기분을 낼 수 있었다. 하지만 혼자서 누리는 시간과 누군가를 기다리며 보내는 시간은 전혀 다른 시간으로 존재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기다리는 두 시간을 여행자의 시간으로 만들기 위해서 근처에 가 볼만한 곳을 찾아 보았다.


대구 관문시장에서 먹었던 맜있는 수수부꾸미. 수수부꾸미란 이름이 재밌는 음식이었다. 뒤에 보이는 어묵국물도 엄청 얼큰하고 맛있었다.



  '삼국유사 도서관'이 눈에 띄었다. 삼국유사가 군위에서 집필된 것을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진 도서관인 듯 했다. 군위읍내에 따로 가볼 곳이 없기도 했고 삼국유사에 대해서도 좀 볼 겸해서 그곳으로 갔다. 도착해서 보니 아마도 삼국유사 도서관은 경북도립군위도서관에서 이름이 바뀐 도서관인 것 같았다. 1층에 삼국유사 자료실이 있는 것 말고는 다른 도서관과 다른 점은 없었다. 게다가 그 자료실마저 잠겨있어서 구경을 할 수도 없었다. 여전히 승관이가 오기까지는 1시간 반 가량 남아 있었다. 확 그냥 먼저 갈까 하다가 이내 조용히 도서관 휴게실에 앉아서 영화 '레 미제라블' 후기를 쓴 후에 다시 터미널로 돌아왔다.


일연이 삼국유사를 집필한 군위에서 나는 레 미제라블 후기를 집필함.ㅋ



  드디어 승관이가 도착을 했다. 대율리로 들어가는 버스 시간까지 또 한 시간이 남아서 근처에서 떡볶이와 어묵을 먹고 저녁에 마실 술과 안주거리를 샀다. 만약 떡볶이를 먹기 전에 승관이에게 경북 지역은 식재료가 많이 나는 곳이 아니라서 음식이 그렇게 맛있지 않을 수도 있다고 한 마디 해줬더라면, 승관이가 그렇게까지 실망하지는 않지 않았을까. 하긴 그렇다해도 그 집 떡볶이 맛은 매우 낯선 것이었다. 후르츠떡볶이란게 있다면 아마 그런 맛이었지 않았을까. 좁은 그곳에서 난 그저 이 떡볶이가 빨리 없어지기를 그리고 그 때까지는, 승관이에게서 자꾸 터져 나오는 웃음이 멈춰주길 바랄 뿐이었다.


대율리로 가는 버스 시간표대율리 가는 버스. 요금은 1000원.



한밤마을 도착

  누군가를 알고 싶다면 함께 여행을 떠나보라고 했던가. 승관이가 버스가 정류장이 아닌 그냥 길 위에서 서는 것을 보고 자꾸 놀라워하는 바람에 얘가 생각보다 더 도시아이일지도 모른다는 새로운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하긴 이런 시골에서 버스를 타본 경험이 없으면 충분히 놀라울 수 있다. 만약에 오늘이 군위 장날이어서 가축과 함께 버스를 타고 가는 상황이었다면 과연 어떤 반응을 보였을지 궁금하기도 했다. 시골 문화에 놀라워하는 승관이와는 달리 나는 끊어지지 않는 카드회사 전화에 쩔쩔매며 씨름해야만 했고, 그러는 사이 우리는 대율리-한밤마을에 도착해 있었다. 


상매댁(남천고택)으로 들어 가는 돌담길



  산으로 둘러싸인 한밤마을은 이름 그대로 밤이 길어서, 우리가 도착했을 때에도 이미 어둑해지고 있었다. 버스에서 내려서 조금 올라가다가 표지판이 안내해주는 데로 들어 가니까 TV에서 봤던 돌담길이 나왔다. 먼 옛날에 아주 큰 홍수가 나서 마을을 감싸고 있는 팔공산 계곡의 돌들이 마을로 떠내려왔고, 그것을 어떻게 치울 방법이 없어서 돌담을 쌓았다는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는 돌담길이 만드는 아름다운 경치 때문에 이곳이 내륙의 제주도라고 불리기도 한다. 약간 쌀쌀했지만 공기는 깨끗했고 마을은 조용해서 여기로 오기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숙소인 남천고택도 기대만큼 조용하고 아름다운 한옥이었다. 거기다 승관이가 아주 마음에 들어해서 이곳으로 오자고 함으로써 가졌던 부담감을 떨쳐낼 수 있었다. 주인 내외분과 인사를 하고 저녁식사를 부탁드린 후 다시 마을로 나와 이곳저곳을 구경했다.


남천고택 정문. 원래 처음 지을 때는 이곳이 정문이 아니었다고 한다. 오른쪽으로 보이는 건물은 한밤마을의 대청.


한밤마을 대청. 한때는 학당으로 쓰였고, 지금은 마을의 노인정으로 쓰고 있다고 한다.


고택에서의 저녁식사

  저녁식사는 주인 내외분과 그날 주인아저씨를 찾아오신 후배 분과 같이 하게 되었다. 원래는 숙박 손님의 식사는 상을 따로 차리는데, 남자 두 명이라 한 상에 차렸다고 괜찮겠냐고 하셨고, 우리도  좁은 방에 상을 두 개나 차리는 게 더 불편할 것 같아서 흔쾌히 괜찮다고 했다. 그러면서 주인아저씨께서는 이제까지는 대부분 남녀이거나 여여(女女)이거나 가족이 왔었는데, 여기에 남남(男男)으로 온 건 우리가 처음이라며 놀라워 하셨다. 친구끼리 이런 곳으로 많이 올거라 생각했는데, 우리가 최초라니 그 말에 우리도 적잖이 놀랬다. 그렇다고 '저희는 게이가 아닙니다'라고 말씀드릴 수도 없고, 뭔가 모를 초조함이 밀려왔지만 부디 오해하지 않으시길 바랄 수 밖에. 다행히 나중에 둘이서 이곳으로 여행 온 동기를 말씀드리고, 결정적으로 승관이가 여자친구 사진을 보여드린 후에서야 조금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저녁은 미나리무침과 된장찌개가 나와서 그 둘을 밥에다 비벼서 먹었는데, 그게 너무 맛있었다. 특히 된장찌개의 맛은 앞서 말한 경북 음식에 대한 생각을 무색하게 만들어 버릴 정도였다. 아주 진한 맛이지만 짜지는 않고 깊은 맛. 은근히 달기까지 한 복잡미묘한 맛. 뭐라고 말로 표현을 못하겠다. 너무 맛있었다. 연신 '너무 맛있습니다'를 연발하며 퍼먹기 바빴다. 손님이니까 어느정도는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여드려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전혀 그럴 필요가 없었다. 두 그릇이나 먹고, 커피도 마시고, 또 과일도 먹었다. 만족스러운 포만감이 들었다. 개인적으로 된장찌개에 아주 엄격한 편인데[각주:1] 이렇게 맛있는 된장찌개는 처음이었다. 우리가 아주머니의 음식솜씨를 칭찬하자 아주머니는 국산콩을 쓰고 물이 맑아서 장이 맛있게 담궈지는 것이라며 겸손해하셨다. 하지만 다음 날 아침에 먹은 식혜[각주:2]도 적당히 달고 맛이 깔끔한 것이 이제껏 먹어 본 식혜 중에 가장 맛있는 것이었다.

 
  식사를 하며 자연스럽게 시작된 대화가 식사를 마치고서도 계속 이어졌다. 주인아저씨와 손님으로 오신 분께서 이것저것 많이 이야기 해주시고 우리는 가만 듣다가 맞장구를 치거나 가끔 우리의 이야기를 얹곤 했다. 아주머니께서는 가끔 이야기를 보태시기도 했지만 그것보다는 웃음으로 분위기를 화기애애하게 만드셨다. 웃음소리가 '호홍홍'하면서 웃으시는데 들어도 들어도 기분좋은 웃음소리였다. 음식도 잘하시고 잘 웃으시는 아주머니와 함께 이렇게 아름다운 고택에서 지내시면서 슬하에 미인인 딸들까지 두신 아저씨가 참 부러웠다. 승관이도 고택에서 사는 것이 자기 노후의 꿈이라고 아저씨에게 부러움 섞인 말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아저씨의 말씀을 들어보니 고택에서의 삶이 마냥 행복한 것만은 아닌 것 같았다.


고택에서의 삶

  남천고택은 지역에서 역사적으로 가치가 있기 때문에 지역을 찾는 관광객에게 개방하여 방문을 허락하고 있지만, 어디까지나 개인의 사유 재산이자 현재도 거주자가 상주하고 있는 곳이기에 겪는 어려움도 많다고 하셨다. 방문객이 찾아주는 것은 고마운 일이지만 일부 방문객들의 무질서한 행위의 뒷감당을 주인내외분께서 다 감당해야하는 데서 고충이 따른다고 하셨다. 물론 지방자치단체의 지원이 있긴 하지만 일상의 공간이 늘 타인에게 개방되어있다는 것은 겪어보지 못한 사람은 알 수 없는 어려움일 것이다. 이런 이유로 개방하지 않는 고택도 상당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남천고택에는 일반적인 방문객과 우리 같은 투숙객이 동시에 있는 경우가 많은데, 소란스러운 방문객 때문에 돈을 내고 숙박하는 투숙객들이 불편을 호소해 주인아저씨께서 중간에서 곤란한 경우도 있으셨다고도 한다.


  이런 어려움이 있지만, 그래도 아저씨는 고택에서의 삶에 자부심을 가지고 계셨다. 우리가 알고 있는 '1박2일'출연 외에도 다수의 여행프로그램과 아침프로그램에서는 메인으로도 출연하신 경험을 가지고 계셨다. 그러고보니 영화배우 명계남씨와 좀 닮은 것 같다는 말에 그래도 그 사람보다는 낫지않냐며 장난스럽게 웃으시기도 했다. 현대화된 다른 고택들에 비해 여전히 손수 장작을 패시고 불을 때우시면서 손님이 오신다고 하면 10번도 넘게 방에 들어가서 온도를 확인해보고 하신다며, 마음을 쏟는 정성만큼은 그 어느 곳보다 자신있다고도 하셨다. 또 이 집의 온돌의 두께가 다른 곳에 비해 두 배정도 두꺼워 한 번 불을 때면 오래 유지되는 것도 좋은 점이라고 하셨다. 예전에 이 집을 지을 때 만석꾼이라 불릴 만큼 부유했지만 으리으리하게 짓지않고 검소하게 지으면서 공간을 최대한 활용할 수 있도록 다락방을 만들었다는 이야기, 정원같은 현재의 모습은 아저씨께서 이곳에서 살아오신 지난 16년 동안 돌 하나 꽃 한 송이 나무 한 그루 손수 옮기시고 심으셔서 꾸민 것이라는 이야기, 날이 풀리면 음악회도 열고, 아이들이 오는 날에는 아궁이에 고구마며 감자도 구워주신다는 이야기들로, 우리는 먹은 배 뿐만 아니라 듣는 귀도 불러와 행복한 포만감을 느낄 수 있었다. 


우리가 하룻밤 묵은 곳. 은은한 나무냄새가 참 좋았다.



까맣고 고요한 밤

  감사하게도 우리에게 나눠주신 술 한잔을 마지막으로 우리는 방으로 돌아왔다. 나무장작을 때서 그런지 방으로 들어서자 가장 먼저 느낀 건 방 안을 가득 채우고 있던 은은한 나무 냄새였다. 아저씨께서 얼마나 정성들여 때셨는지 아랫목은 후끈대다 못해 뜨겁기까지 했다. 언젠가 옛날에 손자들 따시게 있으라고 할머니께서 열심히 아궁이를 때시다가 태워버린 아랫목의 장판이 생각나기도 했다. 아저씨께서 주신 술이 좀 독했는데, 승관이가 마음에 드셨는지 사발에 좀 많이 따라 주신 바람에 승관이가 좀 어지러워했다. 그래서 잠시 바람도 쐬고 야경도 구경할 겸 밖으로 나갔다. 집을 한 바퀴 돌아보고 밖으로 나가서 대청에도 가봤다가 마을도 조금 돌아다녔다. 아무 소리도 안들리는 고요한 밤에 우리의 얘기 소리만 두런두런 돌담길을 따라 흘러가고 있었다. 까맣고 고요한 밤. 밤다운 밤. 조용히 별이 빛나고 있었고, 별똥별이 그 곁을 지나고 있었다. 깊어가는 밤처럼 우리가 나눈 시간도 점점 깊어가고 있었다.






꽃봉오리가 맺힌 산수유 나무와 달. 한밤마을은 노랗게 산수유꽃이 피는 봄이나 빨간 산수유열매가 열리는 가을이 가장 아름답다고 한다. 꽃망울을 보니 3월 초에는 필 것 같았다. 봄이 오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1. 밖에서 먹는 된장찌개는 짜거나 싱겁거나 조미료 맛이 나는게 대부분이다. [본문으로]
  2. 대부분의 식혜는 너무 달아서 잘 안 마시는 편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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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1. BlogIcon 나랑 아니면 2013.02.27 01:39 신고

    드디어 올라왔도다~

    사진이 없어 좀 아쉽다고 생각했지만,
    글을 보니 머릿 속에 그려지는구려ㅎㅎ


    perm. |  mod/del. |  reply.
    • BlogIcon 파란선인장 2013.02.27 01:43 신고

      헐 지금 이시간에 보다니;;;ㅋㅋ 한참 쓰고 있어서 오타도 많고 사진도 없어 ㅎㅎㅎ 내일 다시 오게나.

    • BlogIcon 나랑 아니면 2013.02.27 14:50 신고

      내가 글쓰는 도중에 봣구만ㅋㅋ
      요즘 자는 시간이 좀 늦다~

      진짜 봄이나 가을에 가면 예쁘겠다

  2. 2013.02.27 01:42

    비밀댓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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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BlogIcon Chano 2013.02.27 13:22 신고

    은은한 나무향이 궁금하네. 된장국도.ㅋ
    아...배고프다. 밥먹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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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BlogIcon 생각의 집 2013.02.27 19:08 신고

    1박2일에서 나온 고택이군요~ 아이들과 한 번 가보고 싶었는데, 너무나 즐거운 후기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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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seungkwan 2013.02.27 23:36

    와 디테일하게도 썼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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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데자뷰 2013.03.01 20:58

    잘 봤습니데이~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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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togtogi 2013.03.16 23:05

    *고택스테이 관심있었는데.^^
    *저도 김해로 가는 버스가 갑자기 길 위에 정차하길래 잠깐 당황스러웠던 기억이 있네요.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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