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4시 26분
휴대폰 액정의 시각은 오전 4시 26분. 나는 초조해졌다. 더이상 이대로는 안 된다. 잘못하다간 하룻밤을 꼬박 새우게 될 것이다. 더 늦기 전에, 조금이라도 잘 수 있을 때 뭐라도 해서 이 상황을 해결 해야 한다.
바깥 구경을 마치고 대강 씻은 다음 방에서 이런저런 이야기 좀 하다가 드디어 잠을 자기로 했다. 우리만 입을 다물면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는 밤이었다. 내가 그토록 원하고 바랐던 고요함. 최근 들어 정말 편안하게 자본 적이 있었던가. 잠자리에 들어서도 꽤 오랜 시간을 뒤척거리기 일수였다. 이런저런 생각도 많고 원래 좀 예민한 편이었던 게 좀더 심해져서 불면의 밤들이 지속돼왔다. 하지만 지금 여기에는 층간소음조차 없다. 잠시 일상을 떠나와 이것저것 고민할 문제들도 잊을 수 있다. 그토록 바라던 꿀잠! 드디어 그 간절한 바람이 이루어지는 순간을 맞이한 것이다.
조용한 한옥에서 푹 쉬고 오겠다는 여행 동기에서 나에게 가장 중요했던 건 잠이었다. 하지만 너무 들떠서 흥분해버린 탓이었을까. 아니면 그런 나의 소망은 애초에 헛된 바람이었던 걸까. 결국 또 잠 못 이루는 밤이 되고야 말았다. 승관이를 탓하고 싶진 않다. 그는 그저 잠이 와서 잠들었을 뿐이었다. 다만, 너무 쉽게 잠에 빠지는 것이 나로선 부러울 뿐이었다. 아무리 조용하고 편안해서 컨디션이 좋아도 최소한 10분은 뒤척여야 하는 나에 비해 그는 그저 머리를 베개에 대기만 하면 깊게 잠들었다. 정말로 그가 눕고 하나 둘 셋하면 그의 숨소리가 거칠어지고, 넷 다섯 하면 코를 골기 시작했다. 그의 코고는 소리가 나의 잠을 방해했다고 말하고 싶지 않다. 그저 내가 예민한 것이 문제였고, 나는 정말이지 그를 탓하고 싶지 않다. 거기에는 또 다른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누울 자리를 보고 누웠어야 했다. 앞의 글에서 말했듯이 이 집은 구들이 두껍기 때문에 온도를 올리기는 힘들지만, 한 번 온도가 올라가면 꾸준히 유지된다. 아저씨께서 낮 동안 얼마만큼의 장작을 때셨는지 모르겠지만, 우리가 잠들 때쯤에 방바닥은 불판이었고 우리는 그 위에서 뜨겁게 익어갔다. 승관이는 몸에 열이 많다고 아랫목에서 떨어진 곳으로 자리를 잡았고, 때문에 나는 아랫목에 눕게 되었다. 방 구조상 문 쪽에 잘 수 있는 공간이 있었지만, 외풍이 염려되기도 하고 새로 이불을 깔아야 했기에, 그냥 그 자리에서-멍청하게도- 자기로 한 것이다. 이불 한 장으로는 이 뜨거움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을 한참을 뒤척인 후인 새벽 4시 26분에서야 깨닫게 된 것이다. 정말로 멍청하게도 말이다. 1
그래서 다시 새벽 4시 26분에 더이상 참지 못하고 벌떡 일어난 나는 남은 이불을 모조리 다 바닥에 깔고서야 다시 그 위에 누울 수 있었다. 하지만 긴 뒤척임으로 극도로 예민해져있던 나는 승관이 휴대폰 충전기에서 나는 미세한 소음도 거슬렸고, 승관이에게는 미안했지만 충전기를 빼버리고 말았다. 2 이제는 정말로 아무런 소리가 나지 않았다. 믿을 수 없었지만 승관이도 더이상 코를 골지 않았다. 아, 이제는 드디어 꿀잠을 잘 수 있다! 두근대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막 잠에 빠지려든 순간, 어디선가 들려오는 방정맞은 닭의 울음소리! 그것들의 쉴 새없이 줄지어 울어대는 울음소리를 들으며, 시골 닭은 부지런하다느니, 내일 점심으론 삼계탕을 먹을까라든지, 첫닭이 울면 귀신들도 사라진다던데 밖은 여전히 어둡네라는 등의 쓸데없는 생각을 하면서 간신히 잠에 들게 되었다. 3
전날 먹었던 된장찌개의 된장과 아침에 마신 식혜가 보관되어있는 소중한 장독대
장독대 옆 작은 돌 그릇. 혹은 절구.
아침에 찍은 우리 숙소. 아마도 '쌍백당'?ㅎ
온천 목욕
원래는 아침 6시에 일어나서 근처의 온천에 가서 씻고 마을 입구에 있는 송림을 구경하고 아침 먹고 제 2 석굴암이라는 곳을 가볼 예정이었다. 그러고 시간이 남으면 화본역에도 들러 볼 생각이었다. 휴대폰 알람 덕분에 6시에 일어날 수 있었지만, 밤새 뒤척이다 한 시간정도 잤다는 내 말에 승관이가 그럼 좀더 자자고 해서 우리는 8시 반쯤에 다시 일어났다. 아주머니께서 차려주신 아침을 맛있게 먹고 전날 아저씨와 손님이 추천해주신 마을 아래에 있는 온천호텔사우나로 향했다. 군위에서 떠나는 버스 시간을 맞추려면 제 2 석굴암에서 12시 10분 버스를 타야했기에 조금 서둘러야 했다.
나도 어디가면 빠지지 않는 느림본데, 승관이는 더 했다. 얼른얼른 가서 씻고 나와야 하는데 자꾸만 뒤처져 걷고 있었다. 혹시나 그의 아픈 무릎 때문인가 싶어서 더 채근하지는 못했지만, 그는 무릎은 괜찮다고 하면서 자꾸 뒤처지니까 마음이 급한 나는 자꾸 재촉할 수 밖에 없었다. 여기까지 와서 좀 여유를 느끼며 천천히 움직이고 싶은 마음은 알겠지만, 그런 여유가 나는 지난 밤에 이미 물거품이 되어버렸기에 그냥 빨리 움직여서 일정에 맞춰서 구경하고 무사히 집으로 돌아가야한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리고 한편으로 도시아이인 승관이에게 이런 시골 풍경이 어떤 느낌이었을지 조금 짐작도 되었지만, 나에게 이런 풍경은 매 명절 때와 제사 때마다 보는 그냥 시골 풍경이었기에, 경치구경하고 자시고도 없었다. 우리 빨리 '같이 걸을까'를 부르는 나와 달리 이 '걸음이 느린 아이'는 자꾸만 '느리게 걷자'를 불러대는 상황이었다. 4
목욕은 한 시간 정도 했다. 뜨거운 탕에 몇 번 들어 앉아 있다가 한증막에 잠시 들어갔다가 씻고 나왔다. 거기 온천은 중탄산수라고 해서 물이 뿌옇다고 들었는데, 목욕탕의 물은 그냥 맹물 색깔이었다. 다만 물맛이 좀 색다르긴 했다. 그때는 좀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예전에 먹었던 탄산수 맛과 비슷한 것 같다. 목욕을 마치고 나서는 걸어올 때와는 반대로 내가 시간을 까먹고 있었다. 주위에 보면 간혹 목욕을 오래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게 바로 나다. 그래서 목욕하러 올 때 서두른 것도 있다. 승관이는 씻고 나서 벌써 옷을 다입고 스킨 로션 바르고 있는데, 나는 여전히 드라이 중이었다. 그 목욕탕 드라이가 거지같아서 아무리 드라이를 해도 방금 자고 일어난 것처럼 머리가 산발이 되어 버려 수습이 안됐다. 어쩔 수 없이 모자를 쓰고 나오면서, 승관이와 나는 둘이 힘을 합쳐 시간을 까먹고 있구나, 우린 시간 관리에 있어서는 역시너지관계인가 보다, 라는 생각을 한 것 같다. 5
온천에서 돌아오는 길. 참고로 이글을 보고 아침 9시 이전에 간다면 내게 2000원어치의 고마움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대율리 송림.
대율초등학교 앞의 공터에는 큰 나무들과 그 가지에 그네가 설치되어 있다. 다행스럽게도 우리가 나뭇가지를 부수는 일은 발생하지 않았다.
제2석굴암
목욕을 마치고 마을 입구에 있는 송림을 구경했다. 여지껏 봐왔던 송림들에 비해선 작은 규모였지만, 그 나름대로의 울창함을 즐길 수 있었다. 우리가 예정보다 늦게 움직이는 것을 아셨던 아저씨께서 목욕하고 오면 석굴암까지 태워다 주겠다고 하셨다. 한밤마을에서 석굴암까지는 2km정도밖에 되지 않아 원래는 걸어가려고 했는데, 혹시라도 차시간에 늦을까 직접 태워주신다고 하신 것이다. 예정대로라면 우리는 다시 고택에 갔다가 아저씨 차를 타고 제2석굴암에 가는 것이었는데 목욕을 하고 나서 송림에서 사진찍는다고 노닥거려 더 지체되어 버렸다. 오히려 초조하셨던 아저씨께서 우리를 직접 태우러 나오셔서 자못 송구스러웠다. 걸어서는 한 20분정도 걸릴 것 같았는데, 차를 타고는 한 5분도 걸리지 않은 것 같았다. 도착해서도 우리가 염려되시는지 버스타는 곳을 자꾸 알려주셨다. 아저씨와 아주머니에게서 느꼈던 정으로 나는 다시 회복할 수 있었다. 아저씨의 말씀처럼 몸 건강히 무탈하게 70세까지 고택을 지켜주시기를. 멀어지는 아저씨의 차를 바라보며 언젠가 또 만나뵙 길 바랐다. 6
삼존석굴 전경 | 최대한 줌으로 땡겨서 찍어봤다. |
삼존석굴 주변 경관. 사진은 실제로 보는 것만 못하다.
제2석굴암은 경주의 석굴암이 발견된 후에 발견되어서 그렇게 불리고 있지만 사실은 경주의 석굴암보다 약 1세기 정도 앞선 것이라고 한다. 게다가 이 석굴이 경주 석굴암의 모태가 된 것이라고 하니, 먼저 만들어지고 영향까지 주었는데 이름 앞에 '제2'가 붙는 건 어쩐지 좀 억울할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원래는 '삼존석굴'이나 '팔공산 석굴암'이라고도 불리는데 아직은 '제2석굴암'으로 더 유명한 것 같다. 신라시대에 이곳에는 많은 수도승들이 모여서 그 암자의 수가 80009개에 달했다고 전해지나 임진왜란 때 거의 다 소실되고 이거 하나 남았다고 한다. 국보로 지정되어 있는 문화재라 관리 차원에서 지금은 일반인은 석굴암 내부를 가까이 볼 수 없고, 참배객만 계단을 타고 올라갈 수 있게 되어있다.
눈으로 가득찼던 공간
짧게 구경을 마치고 버스를 기다렸다. 12시 10분에 온다는 버스는 시간이 지나도 오지 않아 불안하게 만들었다. 마침내 반대 차선에서 올라오는 버스를 봤고 기사아저씨께 여쭤보니 올라갔다가 금방 다시 내려온다고 하셔서야 조금 안도할 수 있었다. 버스가 올까봐 화장실에도 못 가고 기다렸는데, 아저씨가 또 금방 내려온다고 하니까 그 말을 믿고 조금 더 참았다가 읍내에 나가서 해결하자고 마음먹었지만, 아저씨는 그렇게 일찍 오지 않았다. 생리현상까지 더해져 정신적 육체적으로 초조해 하는 순간, 저 멀리서부터 눈이 오는게 보였다. 아직 우리가 있는 곳에는 눈이 안 내리는데, 저 멀리 산에서는 눈이 내리고 있었다. 눈이 귀한 곳에서 살아와서 눈 내리는 걸 본 적도 별로 없었는데, 여기는 안 내리고 있는 눈이 그렇게 멀지 않은 곳에서 내리고 있는 건 처음 본 것이다. 눈이 쓰레기처럼 내리는 철원에서 군생활을 할 때도 본 적이 없는 광경이었다. 저 먼 곳에서부터 내리는 눈이 바람을 타고 점점 이곳으로 몰려오고 있었다. 아주 천천히, 그렇지만 분명한 속도로 하얗게 우리가 있는 공간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이윽고 우리의 머리 위에도 그 두껍고 가볍고 하얀 것이 내리기 시작했다. 손을 대기 전까지는 마치 따뜻한 솜처럼 보이는 그 크고 보송보송한 것들이 어느새 우리가 서있는 공간을 채우기 시작했다. 눈이 내리는 그 순간을 맞는 기분을 뭐라 표현할 수가 없는 내 능력이 답답하다. 각자의 몸과 마음에 상처를 가지고 이곳을 찾았다가 떠나는 여행자들을 위해 자연이 주는 선물이자 위로같은 것처럼 느껴졌다. 아무도 없는 그 공간이 이제 막 지상에 내려오는 순수의 것들로 가득채워지는 느낌이었다. 펑펑 내리는 눈 속에서 우리는 그렇게 치유되고 있었다. 그 광경에 취해 어느새 나는 나의 생리적 용무의 다급함도 잊을 수 있게 되었다. 7
폰카메라로 이정도 찍혔으면 정말 눈이 많이 온거란 걸 알아줬으면 좋겠다.
눈은 정말 이쁘게 내렸다. 사진이 더러워서 못 믿을까봐 초조하다.
맛있었던 쌈밥정식. 스마일표시는 인권보호차원.
다시 일상으로
군위읍에서 점심을 해결하고 각자의 버스에 올라탔다. 군위읍내에 어느 집이 맛있는 집인지 몰라서 꽤 방황했다. 현란한 전광판 광고에 홀린 듯 들어갔던 쌈밥집의 쌈밥정식은 훌륭하게 우리의 여정의 마지막을 꾸며주었다. 승관이는 2시 30분에 서울가는 차를, 나는 2시 25분에 대구로 가는 버스를 타고 돌아왔다. 승관이와 만나서 헤어지기까지 22시간 30분. 채 만 하루도 되지 않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우리는 이 기억으로 또 한동안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우리들의 일상은 또 여전히 힘들고 고달프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내 곁에 소중한 사람들이 있다는 것, 또 그런 사람들과 함께 여행을 가서 서로 공유하는 시간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은 그 모든 고통과 상처를 감싸줄 것이라 믿는다.
사는 동안 행복하고 소중한 시간은 여행처럼 아주 드물고 짧은 시간밖에 없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삶에 있어서 소중한 순간은 어쩌면 소중한 사람과 함께 보내는 바로 그 순간이 아닐지.
-끝-
- 새로 이불을 깔기위해서 가방이나 휴대전화 옷가지 등을 또 치워야 했다. [본문으로]
- 갤럭시노트 투 충전기에서 미세하게 소리가 나더라. 예전에 기사에서 본 바로는 갤노트 충전기에서 소음이 발생하는 경우가 많고 간혹 터진 경우도 있다고 해서 더 신경쓰였다.ㅋ [본문으로]
- 그는 아침에 충전기를 꼽지 않고 잔 자신을 책망하였다. 물론 그게 내 짓이었음은 그 자리에서 밝혔다.ㅋ [본문으로]
- 이 때문에 일정이 짧은게 무척 아쉬웠다. [본문으로]
- 오히려 물색깔 본다고 자세히 물을 봤다가... 아니다, 이 얘긴 말자.ㅋ [본문으로]
- 그 때 우리는 늦으면 화본역에 가서 구경하고 기차타고 대구로 갔다가 각자 살 길을 알아보자는 생각을 갖고 있어서 오히려 더 태평했던 것 같기도 하다. [본문으로]
- 군위공영버스터미널로 가는 버스는 아래 로드뷰에서 표지석이 세워진 곳에서 탔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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