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밥집
보리밥집에 도착할 때 쯤에 비가 부슬부슬 내리기 시작하더니 점점 더 비의 형태를 갖춰가고 있었다. 얼른 보리밥 정식 2인분을 시키고 안내된 비닐 하우스로 들어갔다. 비닐하우스에는 세 무리 정도의 사람들이 있었고, 오랜만에 속세의 사람들을 만난 느낌이었다. 여기에 도착한 시간이 13시 30분 쯤이었는데, 보리밥집이 선암사와 송광사의 중간 정도의 위치라 생각하면 여유롭지가 않았다. 시간도 없고 지치고 배고프고 게다가 보리밥도 맛있고 해서 우리는 빠른 속도로 밥을 먹어 치웠다. 그렇게 13시 50분에 송광사로 출발. 보리밥집 아주머니의 말씀에 따르면 송광사까지 2시간 정도 걸린다니 서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래도 송광사까지는 아마 내리막길일 것 같고, 그러면 2시간도 안되어서 도착할 수 있겠다 싶었다. 아주머니에게서 그 말을 들었을 때 우리는 불가능 할 것 같아서 근처의 마을로 가려고 했는데, 마을이 멀었던가 아니면 시내로 나가는 버스 문제로 그 방법은 포기했었다. 우리에겐 송광사로 제시간 내에 가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은 없었다.
비벼서 먹으려는 찰나에 생각나서 찍은 사진.
송광사로 가는 길은 예상과는 달리 오르막길만 주구장창 계속되었다. 몸이 힘든 것도 힘든 거지만, 이대로 가다가는 제 시간에 도착을 못할 것 같아서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마음은 초조한데 몸은 뜻대로 움직여 주질 않고... 어쨌든 최대한 열심히 다리를 움직여서 앞으로 가는 수 밖에 없었다. 물론 그 버스를 놓친다거나 오늘 기차를 못 탄다고 해서 아주 큰 타격이 있는 건 아니었다. 내일 딱히 약속도 없었으며, 하루 숙박비와 식비가 더 들겠지만 이 고통에 비하면 그 정도는 치를 만한 것이었다. 찬이 그렇게 말해주었을 때 그냥 그러자고 할까 싶기도 했지만, 제 시간에 도착하고 싶은 마음이 더 강했다. 힘들다고 포기해버리면 또 실패하는 거니까. 이것마저 여기서 포기해버린다면 난 다시 한없이 무기력해질 것 같았다. 내가 내 자신을 부끄러워하게는 만들지 말자. 지금 할 수 있는 데서는 최선을 다해서 한 번 가보자. 그리고 나 때문에 친구에게 폐를 끼치지 말자. 한 걸음 한 걸음에 이런 생각들을 하면서 기어올랐다.
어느덧 오르막이 끝나고 다시 내리막이 시작되었다. 무릎이 너무 아팠지만 그래도 숨도 안차고 힘들지도 않아서 조금 더 속도를 낼 수 있게 되었다. 최대한 안 아프게 왼쪽 다리만 쓰다보니 나중에는 왼쪽 무릎도 아파서 어쩔수 없이 중간중간에 조금씩 쉬면서 가야했다. 아니 다른 사람들은 산행하기 좋다는데 왜이리 힘들지? 아니면 나만 이 고생인건가. 하긴 같이 산행한 찬은 나보다는 상태가 나은 것 같았다. 아, 평소에 운동 좀 해놓을 걸. 무릎만 안 아팠어도 그나마 할 만했을 텐데. 위에서 써놓은 내용만 보면 무슨 히말라야 다녀 온 것 같다. 좀… 부끄럽네.
이 대숲이 나오면 거의 다 온 것.
스치듯 안녕, 송광사
물을 건너고 다리를 지나고 좀 있으니까 돌길이 끝나고 흙길이 나타났다. 그리고 대숲이 나왔는데, 찬이 대숲에 온 거면 다 온거라는 말에 겨우 안도할 수 있었다. 이때가 아마도 15시25분쯤이었던 것 같다. 버스시간까지는 15분정도 남은 것이다. 사실 송광사에서 버스 정류장까지 얼마나 걸리는 지 몰라서 자꾸만 송광사를 잠시만이라도 보고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이번 여행의 주요 목적지가 순천만과 송광사였는데 송광사를 못보고 가야한다는 것이 마냥 아쉬웠기 때문이다. 한 5분만 후딱 보고 버스타러 가면 안될까 싶었는데, 그러기엔 시간이 너무 빠듯한가 싶기도 해서 고민하는 중에 어느새 송광사 앞까지 다다르게 되었다. 찬에게 말해볼까 말까 하는데 뒤에서 어떤 여자 두 명이 후다닥 뛰어 내려가는 것을 보고 찬이 ‘쟤네들도 버스타러 가는 가보다. 우리도 뛰자.’라는 말과 함께 우리도 뛰어 내려갈 수 밖에 없었다. 뭔가 이번 산행은 나를 앞으로 가도록 밀어붙이는 어떤 힘이 있는 것 같았다. 뛰는데 역시나 무릎이 너무 아파서 절뚝거리며 뛸 수 밖에 없었고 그래서 속도를 제대로 낼 수 없었다. 진짜 이를 악물고 열심히 뛰었지만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뛰는 척하는 걷기로 보일 정도였다. 표정은 마라토넌데 절뚝이며 걷고 있는 내가 안쓰러웠는지 지나가는 사람들의 눈빛에서 측은함도 느껴졌다. 무릎이 너무 아파서 못 뛰겠는데 버스 정류장은 안 나오고 저 앞에서 찬은 뛰어가다 나를 한 번 돌아보고 다시 뛰어가다 또 애처롭게 쳐다보고... 이제 눈물까지 찔끔찔끔 나오고 있었다. 무슨 이렇게까지 하면서 버스를 타야 되나. 평생 살면서 이렇게까지 이를 악물고 뛰었던 적이 있었나. 아 그냥 미안하다 하고 못 다 본 송광사나 좀 구경하고 하룻밤 더 자고 내일은 낙안 읍성에도 갔다가 집에 갈까. 근데 이렇게까지 왔는데 여기서 포기하는 건 너무 아쉬웠다. 그러면 이제껏 아픈 거 참으면서 온 게 뭐가 되나. 차라리 애초에 뛰지 않았으면 모르겠는데 이제는 다른 방법은 없었다. 조금만 더 참고 뛰어 가는 수 밖에.
밖에서 본 송광사가 너무 예뻤어ㅠㅠ
선암사와는 다른 매력이 있어.
버스 앞에서 초조하게 애처롭게 날 바라보고 있는 찬이 보였다. 아 이제 다 왔네. 설마 시간이 다 됐어도 이렇게 불쌍하게 뛰고 있는 날 보고도 버스가 그냥 출발하진 않겠지. 버스에 올라타고 자리에 앉자마자 시계는 15시 40분으로 바뀌었고 버스는 출발하였다.
순천역 앞에 도착해서 편의점에서 간단한 저녁거리를 사고 또 뛰었다. 열심히 뛴 덕분에 기차시간에 늦지 않았고, 무사히라고 하기엔 몸이 고되었지만, 집으로 돌아 올 수 있었다.
'킥'
애초에 바람이나 쐬러 떠난 여행이 어느새 극기훈련이 되어 있었다. 비루한 몸뚱이덕에 남들은 자연속에서 여유와 활기를 찾아가는 등산에서 오기와 극기를 배워갈 수 있었다. 과한 의미 부여였는지도 모르겠지만, 뭔가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내가 밀어붙여진 느낌도 들었었다. 어쨌든 중간에 포기하지 않았다는 점이 돌아오는 내내 내 마음을 흐뭇하게 만들었다. 찬이 괜히 뛰자고 해서 무릎이 더 아팠던 것 같다고 미안해 했는데, 어떻게든 아팠을 무릎이었기 때문에 상관없었다. 그리고 이번 여행에서 다시 느낀 것이지만, 찬은 참 좋은 친구였다. 덕분에 더 즐거웠고, 고마운 점도 많았다. 정말 친한 친구라도 같이 똥을 싸기는 힘든데 우리는 그런 경험도 공유하는 사이가 되어 버렸다. 최근에 여행 약발이 다 된 것 같아서 약 한 달이 지난 시점에서 여행 후기를 남긴다. 쓰다 보니 지루하고 나 혼자만의 주절거림이 된 것 같지만 이왕 쓴 거 나중에 부끄럽더라도 기록을 남긴다.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봄에 선암사와 송광사에 다시 가고 싶다.
20111122~20111123까지 순천여행을 다녀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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