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암사에서 대각암으로 올라가는길에 있는 마애여래입상.
기어서 장군봉까지
멀리 장군봉이 보였다. 막상 눈으로 보니 꽤 멀어 보였다. 이걸 가야 하나. 지금이라도 그냥 보리밥집으로 바로 가자고 찬에게 말해볼까. 얼마전 예비군 훈련 때 산 탔다가 온몸의 괄약근이 풀릴 뻔했었는데. 오만 생각이 들었지만, 일단은 가보기로 했다. 저 산이 높다하되 하늘 아래 뫼이거늘.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리 있으랴. 힘차게 발걸음을 내딛은 지 30분도 지나지 않아 나는 나무를 부여잡고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처음에는 할 만했다. 길 옆으로 난 싸리(라고 추정되는 식물)가 바람을 막아줘서 많이 춥지도 않았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오르막이 시작되었고 순식간에 지쳐버린 것이다. 찬은 올여름 시간이 날 때마다 집 뒷산을 오르내렸다고 했다. 자기집 뒷산은 험한 편이라 조계산은 좀 수월하다며 성실하게 저만치 앞서 가고 있었다. 그에 비해 난 아무런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아서, 중간중간 조금씩 휴식을 취해야만 했다. 군대에 있을 때는 관측병이여서 준비태세가 걸리거나 훈련을 나가면 항상 군장과 무전기를 양 어깨에 둘러매고 관측소에 오르곤 했었는데... 하긴 전역하고 갔던 천왕봉에서도 혼자 지쳐버려서 친구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했었지. 그제서야 나는 등산은 안되겠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점점 등산이 좋아지고 있었는데. 나는 등산이랑 안 맞는 것 같아. 그지? 안 맞지? 안 되겠다. 이거 사람 불러야 돼. 산 빠릿빠릿 잘 타는 사람으로…
저기 멀리 보이는 장군봉
바위에 앉아서 멍하니 내 체력을 한탄하면서 얼마나 남았는지 추측하기 위해 지도를 꺼냈다. 수시로 빼서 보기 위해 바지 호주머니에 지도를 넣고 다녔는데, 뭔가 호주머니가 허전해서 보니까 같이 넣어 뒀던 교통카드가 없어진 것이다. 원래는 휴대폰에 달고 다녔는데, 새로 바꾼 스마트 폰에는 그걸 걸 수 있는 고리가 없어서 쓸 때마다 호주머니에 넣어 가지고 다녔던 것이다. 순천 시내버스도 결제가 된다고 해서 이번 여행 때 들고 왔다가 어제 순천 시내에서 새로 충전했었는데. 아마도 선암사에서 지도를 꺼내 보다가 흘린 것 같았다. 여기까지 와서 다시 내려가자고 할 수도 없고, 내려간다고 해서 찾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쉽지만 깔끔하게 포기해야 할 것 같았다. 하지만 나름 나에겐 의미있는 교통카드여서 쉽게 포기가 안됐다. 그래, 아까 절하고 안낸 돈 대신 시주했다고 생각하자. 시주 안 했던 것이 좀 그랬는데, 차라리 잘 됐다 싶었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아쉬운 마음은 금할 길이 없어 나중에도 간간히 ‘아…내 교통카드…’라고 중얼거리곤 했다.
선암사에서 출발할 때만 해도 하늘이 파란 것이 쾌청했는데, 산을 오르면 오를수록 짙은 구름이 산 너머에서 몰려 오고 있었다. 약간 걱정이 되었지만 비가 온다고 해서 다시 내려갈 수 있는 것도 아니었고, 설마 진짜로 비가 오지는 않겠지 하는 마음이 있었다. 하지만 상황은 그런 내 마음과는 다르게 흘러 가고 있었다. 곧 사라질 듯 하던 구름은 이내 다시 짙은 빛깔을 띠며 모여 들기 시작했다. 그때 나에겐 날씨 걱정보다는 내 저질 체력이 더 걱정이었다. 파도처럼 계속해서 밀려오는 오르막길 앞에서 기진맥진해서 한 걸음씩 내딛는 것에만 온 정신을 집중하고 있었다. 그러다 바람소리 치고는 뭔가 리드미컬한 소리를 듣게 되었을 때 하늘에서 차가운 것이 떨어지고 있었다. 결국 비가 내리기 시작하는 건가. 초행길인 우리에게 그 길 위에 누구라도 다른 사람이 있었다면 그 사람에 의지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지만, 산 중에는 오로지 나와 찬 뿐이었다. 그렇다고 비를 피할 만한 장소가 있는 것도 아니었고, 다시 내려가기도 힘들고, 이대로 올라가기도 애매했다. 그러던 차에 찬이 비가 아니라고 해서 봤더니 작은 얼음 알갱이였다. 이를 테면 우박 같은 것이었는데, 이 정도는 괜찮겠다 싶어서 다시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그날이 아마 강원도 산간지방이랑 지리산 노고단 등에 첫 눈이 온 날이었을 것이다. 우리도 눈이였으면 좀더 좋았겠지만, 비가 아님을 다행으로 여기며 장군봉을 향해 다시 오르기 시작했다.
기억날진 모르겠지만, 우리는 단풍구경으로 순천엘 온 것이었다. 유일하게 봤던 오그라 들어가던 단풍.
장군봉은 오르고 올라도 못 오를 것만 같았다. 가도가도 저 멀리에 있을 뿐이었다. 아마도 저기가 끝이겠지 싶어서 올라가면 뒤에 더 높은 봉우리가 나타났고, 이제 이보다 높을 수는 없다고 생각한 곳 뒤에서 다시 더 높은 곳이 더 멀리 있는 것이었다. 완만하다더니, 누구나 쉽게 산행할 수 있다고 하더니, 역시 산은 산인가. 더구나 순도 99%의 저질체력을 가지고 너무 쉽게 생각한 것이 실수였다. 내가 생각했던 내 몸의 한계와 실제 몸이 감당할 수 있는 한계는 분명한 차이가 있었던 것이다. 계속 되는 오르막길에 완전히 지쳤다고 생각했을 때 갑자기 다람쥐가 나타나 구경한다고 쉴 수 있었고, 또 이제 끝이다 라고 생각했을 때 바위틈에서 나오는 약수를 마시고 또 조금 더 힘을 낼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과한 의미 부여일진 모르겠지만, 산이 나를 포기하지 못하도록, 어떻게든 끝까지 올라가도록 응원해준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물론 그런게 아니더라도 끝까지 올랐을 수도 있었겠지만, 그런 작은 것 하나하나가 순간순간 다시 올라갈 수 있는 힘을 준 건 분명한 일이었다. 생명수
정상에서 먹는 귤맛은 꿀맛
마침내 더 이상 높은 곳이 보이지 않는 곳에 도착하였다. 해발 884M. 높다고 말할 순 없지만, 결코 낮지도 않은 높이. 나에겐 1500M가 넘는 천왕봉이나 1000M가 되지 않는 장군봉이나 힘든 건 마찬가지였다. 사람이라곤 거의 없는 산길을 단 둘이 오르면서 한 걸음 한 걸음에 집중하다 보니 현재의 상황과 고민들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수 있었고, 나의 단점에 대해서도 적나라하게 볼 수 있어서 오히려 이번 산행이 개인적으로는 더 의미있는 것이었다. 온 몸이 땀에 젖었고, 다리는 후들거리고, 극도로 지친 상태였지만, 정상이 주는 성취감과 시원함은 그런 것들에 대해 충분한 보상이 되었다. 아쉽게도 하늘은 구름이 가득 끼여 있었지만, 구름 사이로 새어 나오는 빛줄기에서 희망같은 것이 느껴지기까지 했다. 구름 사이로 뻗어 있는 빛줄기를 바라보며 저게 우리의 앞날이라 생각하자라고 말했다. 이 답답한 상황에서 한 줄기의 빛이라도 새어 나오기를 바라며. 이 또한 나의 과한 의미부여인지는 모르겠지만 순간 구름 사이로 새어 나온 빛이 우리를 비춰주었다.
장군봉 정상
고된 산행뒤엔 평소엔 사소한 것도 감동으로 다가오더라.
찬이 싸왔던 과일 중 남아있던 귤을 까 먹었다. 사람들이 왜 산에 갈 때 귤을 가져가는지 비로소 알게 되었다. 너무너무너무 맛있고 시원했다. 한 개의 귤로 소생하는 듯한 기분. 귤도 까먹으면서 정상에서 사진도 찍고 좀 쉬었다. 이때 시간이 12시 30분 정도여서 오래 쉴 순 없었고 얼른 다시 내려가야 했다. 내려가기 전에 어떤 아저씨를 만났는데, 혼자서 조계산 일대에 산행을 오신 것 같았다. 우리에게 조계산에서 다니기 좋은 코스를 가르쳐 주시곤 우리의 목적지를 물으셨다. 보리밥집에서 점심을 먹고 송광사에 간다고 하자 운동 겸 다이어트 하려고 산에 오르는데 밥먹으러 간단 말이냐 허허허 하시면서 자신의 목적지로 가셨다. 그때 생각했다. 아, 우리는 여기에 관광을 목적으로 왔는데, 어느새 극기 훈련이 되었구나.
계곡을 따라 보리밥집으로
보리밥집으로 가는 길은 거의가 내리막이었다. 그렇다고 결코 쉬웠던 것은 아니었다. 예전에 천왕봉에 갔을 때 하산하다가 무릎을 다쳤는데 이게 운동을 심하게 하거나 산을 타면 다시 아프곤 했다. 내리막을 내려가자마자 역시나 무릎에서 통증이 시작되었다. 그나마 오른쪽 무릎만 아파서 왼쪽 다리를 써서 내려가면 그런대로 내려 갈 수는 있었다. 하지만 한쪽 다리만 사용하는 것은 불편했고 그만큼 우리의 진행도 더뎌졌다. 오르막에선 지치고 숨차고 힘들어서 문제였다면 내리막에서는 통증이 주는 고통이 힘들게 했다.
보리밥집으로 가는 길에도 역시 나와 찬 뿐이었다. 내려가는 길에는 바람이 엄청 불었는데, 추운 것보다는 소리가 주는 위압감이 엄청났다. 잎이 다 져버린 빈 나뭇가지 수만 개가 불어오는 바람에 따라 내는 소리는 무형의 존재가 멀리서부터 서서히 그러나 빠른 속도로 우리를 에워싸는 것 같았다. 비행기 수백 대가 우리 주위를 지나가는 느낌. 자연 속에서 인간이란 바람소리에도 겁을 먹는 작은 존재인지 내가 하찮은 건지 잠시 사색에 빠지기도.
장군봉에서 조금만 내려가면 길은 계곡을 따라 이어진다. 계절상 늦가을 또는 초겨울이면 계곡의 물이 줄어드는데, 어제 밤 내린 비 덕분에 수량이 많아져서 계곡에서는 끊임없이 청량한 소리가 나고 있어서 힘든 몸을 대신해 기분만은 상쾌하게 해주고 있었다. 가다보니 길에서 계곡으로 갈 수 있는 지점이 나타나서 잠시 물을 마실 수 있었다. 물을 마시기 위해 돌을 디디는데 다리가 다 후들거렸다. 미끄러지지 않게 조심하면서 물을 마셨는데, 그 맛이 정말 맑고 깨끗했다. 칠성사이다와는 비교도 안 되는 맑고 깨끗함. 맛이 맑고 깨끗하다는 건 말이 안 되는데, 다르게는 말로 설명할 수가 없다. 어제 내린 비가 흐르면서 바위와 흙과 단풍잎을 우려낸 맛이랄까.
계곡에서 본 폭포
그 후로는 거의 평지여서 이동하기가 훨씬 수월했다. 그렇게 열심히 걸어가고 있는데 저 앞에서 웬 아저씨 두 명이 계곡 옆에서 옷을 벗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 아저씨들은 옷을 벗는 데 집중하느라 우리가 가까이 오는 것을 모르는 듯 했다. 계곡에 들어가려나 보다라고 생각은 했지만 팬티까지 벗어버린 적나라한 노모자이크의 광경에 나도 당장 계곡으로 뛰어들어 더럽혀진 내 눈을 씻어버리고 싶었다. 그 아저씨들은 정말로 시원해 했는데, 그 점만은 좀 부러워 나도 계곡에 들어가 땀을 좀 씻어내고 싶은 마음이 생기다가도 그 더러운 노모의 장면만 생각하면... 다시 상류로 올라가 오줌이라도 싸버리자고 찬에게 농담인 척 이야기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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