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영화

레미제라블 - 바리케이트 너머로

파란선인장 2013. 2. 26. 08:00
반응형


  이제는 우리나라에서도 상당히 대중적인 공연예술장르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지만, 여전히 뮤지컬에 어색함을 느끼는 사람들은 존재한다. 아무래도 아직은 뮤지컬이라는 장르에 익숙하지 않아서 그럴 것이다. 그렇게 느끼게 하는 원인은 아마도 그 전달방식 때문이지 않나 생각한다. 일상적인 장면에서 일상적인 대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노래를 부르다는 것이 어색하고 낯선 거리감을 생기게 한다. 그리고 공연예술이 가지는 태생적인 한계인 접근성의 문제 때문에도 좀더 대중적인 인기를 누리지 못하는 것 같다. 뮤지컬은 공연 장소와 시간이 한정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즐기기에 한계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즉, 영화처럼 복제된 필름으로 언제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배우들이 무대 위에서 직접 공연하는 그 순간 그 장소가 아니면 관람하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앞에서 언급한 단점들에도 불구하고 상당수의 사람들은 뮤지컬을 좋아하고 즐기고 있다. 접근성으로 인한 불편함은 얼마든지 감수할 수 있는 문제일 것이고, 전달방식이 주는 거리감은 오히려 뮤지컬이 가지는 매력이라고 역설할 수도 있다. 뮤지컬에서 노래야말로 뮤지컬이 존재하는 이유이자 가장 크게 매력을 느끼게 하는 요소이니까 말이다. 인물이 처한 어떤 상황에서 그 인물의 감정을 노래로 부르는 것은 최소한의 서사가 유지되는 맥락속에서 인물의 정서를 극대화시킴으로써 시너지를 발생시킨다. 그 때 관객들은 감동을 받게 되는 것이다. 영화 '레미제라블'의 개봉초기에 관객들의 여론이 호불호로 갈렸던 것은 '송스루(Song-through)'라는 뮤지컬의 전달방식이 아직은 우리나라 관객들에게는 낯선 것이기 때문이고, '레미제라블'을 보고 감동을 받는 사람이 많은 것은 고전의 서사속에서 살아난 인물들에게 공감할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영화 '레미제라블'은 영화가 가지는 장점을 이용해 뮤지컬이 줄 수 있는 감동을 최대한 살린 작품이다. 영화라는 장르에서는 다소 낯선 송스루 방식을 적용해서 뮤지컬 원작의 음악들을 거의 고스란히 스크린으로 재현하고 있다. 그래서 처음의 거리감만 극복해낸다면 훌륭한 음악들이 주는 즐거움과 감동을 느낄 수 있게 된 것이다. 거기에 무대로는 표현이 어려운 연출이 영화를 통해서 사실적이며 때론 웅장하게 표현됨으로써 시각적으로도 만족을 주고 있다. 초반의 어색함을 이기지 못한 관객-특히 여자친구 때문에 멋모르고 보게 된 일부 남성관객들-에게는 고역의 시간이었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렇지 않았다면 분명 눈과 귀가 동시에 즐거운 경험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 작품에서는 서사의 진행보다는 인물의 정서 표현에 더 많이 집중하고 있다. 힘겨운 상황에 처한 인물들이 간절하게 또 절실하게 부르는 노래를 듣다보면 어느새 관객들도 그 인물의 정서를 이해하고 공감하게 된다. 이 이해와 공감은 곧 관객의 감정도 폭발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다. 여기에 배우들의 훌륭한 연기까지 더해지게 되어 그 폭발을 더 강력하게 만들고 이것이 관객들에게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만들고 감동을 주는 것이다. 자신의 잘못을 용서해 준 신부님의 사랑에 지난 날의 과오를 반성하며 신의 무릎 앞에서 맹세하는 장발장의 모습에서 누군가는 감동을 느낄 것이다. 또는 영원한 자유와 양심사이에서 'Who am I'라고 외치는 장발잘의 모습에서 감동을 느낄 수도 있다. 절망적이고 비극적인 상황에서 'I dreamed a dream'이라 구슬피 우는 판틴의 모습에서 함께 슬퍼할 수 도 있다.  또 어떤 사람은 누구보다 자신의 신념을 지키며 살아온 자베트의 절망에 공감했을 것이고, 또 어떤 사람은 젊은 학생들로 이루어진 혁명군들이 쌓은 바리케이트와 그것이 무너지는 것을 보면서 함께 좌절했을것이다. 누군가는 코제트와 마리우스의 사랑에 가슴 졸였을 것이고, 또 누군가는 에포닌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고백하는 'On my own'에 함께 울었을 것이다. 코제트에 대한 장발장의 책임과 헌신에 가슴이 찡했던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렇게 말그대로의 '불쌍한 사람들'이 처한 상황은 관객 각자의 힘든 상황에 대응되면서 그 인물들의 정서와 감정에도 일치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점을 생각해보면 영화 '레미제라블'이 우리나라에서 기대이상의 흥행을 기록한 것은 조금은 서글픈 일이다.


개인적으로 판틴역의 앤 해서웨이가 'I dreamed a dream'을 부를 때가 가장 감동적이었는데, 노래도 노래지만 그녀의 연기에 많이 감동을 했었다. 아카데미 여우조연상 충분히 받을만 하다.



  작품 속의 다양한 인물들의 삶은 영화의 마지막으로 가면서 바리케이트 위로 모이게 된다. 영화에서 바리케이트는 혁명군이 정부군에 대항하기 위해 쌓은 것이지만, 후반부로 갈 수록 그 의미는 장소적인 것을 뛰어넘게 된다. 혁명군이 방어의 목적으로 쌓은 바리케이트지만, 그들의 최후의 목표는 그 바리케이트를 넘어서는 것이었다. 바리케이트를 넘어서는 것, 그것이야말로 다양한 인물들의 삶의 궤적이 모여서 나아갈 방향을 제시해주는 것이다. 처음에는 자유를 위해, 나중에는 코제트를 위해 오랜기간 도망다녀야 했던 삶은 장발장에게 지켜야하는 것이면서 넘어서야 하는 바리케이트인 것이다. 누군가는 바리케이트를 넘어갔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다. 그렇다면 그 바리케이트를 끝내 넘어서는 힘은 어디에서 오는가? 어떤 조건도 없는 사랑으로부터 그 힘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이 자식에 대한 사랑이든 연인에 대한 사랑이든, 아니면 인간에 대한 사랑이든 종교적인 사랑이든, 그 사랑을 베풀수 있을 때 우리의 앞을 막고 있는 바리케이트를 넘어 새로운 내일을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 설령 그것이 아무리 높고 단단하다 할 지라도.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