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오는 날엔 김치전과 잡생각이 딱이다.
타닥탁탁 탁타다닥.
유난스런 빗소리에 잠시 기지개를 폈다. 어제까지는 그렇게 덥더니, 지금은 또 시원하게 비가 내리고 있다. 주위를 둘러보니 딴 짓을 하고 있는 이는 나 혼자뿐이고, 대부분은 자신들의 책에 집중하고 있다. 군데군데 엎드려 있는 사람도 있긴 하다. 이렇게 비가 오는 날에는 하루정도 쉴 수도 있을텐데, 사람들은 오늘도 어김없이 자리를 잡고 앉아서는 그 어떤 무언가를 위해서 책을 보고, 한편으론 그런 것들에 쫓기는 듯이 열심히 뭔가를 또 적고 있다. 내 앞에도 놓여져 있는 책을 바라보다 이내 다시 창 밖으로 시선을 줘 본다. 비가 그리는 무수한 직선의 궤적들 틈 어디에선가 짧은 한숨이 세어 나왔다.
시간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정말 그럴 수만 있다면 당장이라도 그러고 싶다. 이놈의 인생을 다시 시작한다면 지금과 같은 상황은 피할 수 있지 않았을까. 당장 1년 전으로 돌아만 가도 훨씬 달라져 있을 것이다. 정말 정신차려서 또 다시 후회하지 않도록 열심히 살았겠지. 아니, 그렇다면 이왕 돌아가는 거 전역후로 가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그런다면 초반에 반짝했던 보람찬 생활을 지속시켰을텐데. 게다가 만약에 그때 했던 다짐들중에 몇 개만이라도 지켰더라면 아마 뭘 했어도 했을 것이다.
돈데크만을 어서 빨리 사야 할텐데.
조금 더 돌려서, 대학 입학때로 돌아가고도 싶다. 지금 그때를 생각해보면 너무나 어렸었다. 다시 돌아간다면 대학생때 아니면 할 수 없는 경험들을 실컷해보며 좀 더 멋지게 살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다시 입대한다는게 좀 걸리지만, 그깟 군대 한 번 가봤는데 두 번 못 가겠나. 웃으며 입대할 수도 있다. 이런저런 경험들을 하면서 학점도 철저히 관리할 것이다. 더불어 예쁜 여학생들까지.
우르릉.
확실히 이제 우리나라는 아열대 기후가 돼 버린것 같다. 요새는 비 좀 온다 싶으면 천둥이 치는 건 기본이 된 듯 하다. 고등학교때만 해도 이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그러고보면 고등학교때로 돌아가는 것도 좋을 것 같다. 그땐 참 좋은 친구들과 함께 지내면서 재미있는 추억도 많이 만들었었는데. 다시 한번 그때를 사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물론 입시공부는 좀 짜증나겠지만. 뭐, 군대도 다시 가겠다는데 문제될 게 있나. 그리고 잘하면 IMF 이후로 심하게 휘청거리던 집안 형편도 어떻게 추스릴 수 있지 않을까. 아니면 아예 초딩요시절로 돌아가서 미래에 닥칠 모든 재난에 대비해 버릴까. '남기한'처럼 나도 엘리트가 되기 위한 인생을 설계해서 새로운 인생을 살아볼 수도 있을텐데 말이다.
아니면 나도 뜀박질이라도 해야하나.
쿠르릉.
다시 한 번 천둥소리가…… 뱃 속에서 울려퍼졌다. 쓸데없이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보니 벌써 밥때가 다 된 모양이다. 그래, 어찌보면 인생이란게 별게 아니고 다 잘 먹고 잘 싸자는 것인데, 이미 소화된 옛 일을 붙잡고 이런저런 잡생각에 후회하고 미련 떨어 봤자 무슨 소용이겠는가. 잘 쌌던 못 쌌던 이미 싸버린건데. 그것들을 붙잡고 있어봤자 숙변밖에 더 되지 않겠나. 숙변 생기면 똥배만 나올 뿐이고 심해지면 복통에 피부트러블까지 아주 피곤해질 뿐이다. 게다가 나중에라도 억지로 내보내려고 할 때, 그때의 그 찢어지는 고통을 생각하면 애초에 남겨놓지 않는 것이 몸과 마음의 건강에 이로울 것이다.
사람이란게 완벽한 존재가 아니기에 살다보면 누구나 후회스럽고 아쉬운 과거가 있을거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현재보다 더 좋았던 때로 돌아 가고 싶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과거의 그 일이 어떤 일이었든 우리는 그로부터 많든 적든 얻은 것이 있다. 마치 음식을 소화시켜 살아가는데 필요한 에너지를 얻듯이, 그런 과거의 경험들이 우리가 현재와 미래를 살아가는데 필요한 또다른 에너지를 제공하는게 아닐까? 좋은 추억이든, 후회와 아쉬움으로 얼룩진 기억이든 그것들을 통해서 때로는 힘을 얻고 때로는 반성도 해가며 성숙해 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정말 중요한 사실 하나는 우리는 현재로써는 시간을 되돌릴 어떤 방법도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최선의 방법은 무엇일까? 바로 지금 현재를 후회없이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훗날의 어느 순간 지금을 웃으며 떠올릴 수 있게 말이다.
밖으로 나왔다. 어느새 비가 그쳤다. 멀리 산봉우리가 아직은 구름에 가려져있고, 이제 막 피기 시작한 장미의 향기가 공기속에서 진동(振動)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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