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ogcasting/우물쭈물 사는 이야기

▶◀ 5월27일 봉하마을 조문

파란선인장 2009. 5. 29. 0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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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당신이 떠나신 그날 밤 이상한 꿈을 꾸었습니다. 꿈 속에서 거북이 한 마리를 보았습니다. 시커먼 냇물 속에서 죽어있는 거북이를 전 단지 다리위에서 쳐다만 보고 있었습니다.

셔틀버스. 참고로 제가 사진을 찍기는 찍었는데 그리 잘 찍지 못해서 보기에 불편하실 수도 있을 겁니다. 분위기도 그렇고 제 기분도 그렇고 뭔가 제대로 찍기가 힘들더군요. 어차피 제대로 찍어도 별반 차이가 없기도 합니다. 양해 바랍니다.


 진영터미널에서 내렸다. 여기까지 데려다 준 14번 버스는 아마도 노선이 생긴 이후 가장 많은 사람들을 태우고 있는 것 같았다. 버스가 멈추고 문이 열리자 그때까지 가득찼었던 버스가 일순간 텅 비어버렸다. 사람들은 진영버스터미널에서 셔틀버스를 기다렸다. 볕이 따가웠지만 누구하나 짜증내지 않고 검은 옷들 속에서 땀을 흘리고 있었다. 셔틀버스는 봉하마을로 향했다. 내 옆에 앉으신 어르신은 나에게 학생이냐고 물었다. 난 그 비슷한거라고 웃었다. 아저씨는 혼잣말 비슷하게 젊은 사람들이 많이 와야 할텐데라고 하셨다. 

 봉하마을 입구에선 걸어가야 했다. 거의 1년만에 다시 오게 되었다. 작년에 왔을 때도 정말 더운 날이었다. 그땐 혼자서 자전거 타고 왔었는데. 죽을 고비도 넘기며 겨우 도착했었다. 오전에 한 번, 오후에 한 번으로 정해진 시간이 있었는데, 운 좋게도 오전에 예정된 시각의 10분전에 도착했었다. 그땐 날씨도 덥고 도로도 위험해서 정말 힘들게 왔었다. 거의 반 오기로 왔었는데. 그래도 도착했을때는 기뻤는데. 오늘은 편하게 왔지만 전혀 기쁘지 않았다. 길게 이어진 행열엔 젊은 사람도 있었고 나이 드신 분들도 계셨다. 입구에서부터 만장이 휘날리고 있었다. 누군가의 마음을 담은 글귀도 함께 펄럭였다. 그걸 보는 내 마음도 울렁였다. 

 자원봉사자분들의 안내에 따라 두 줄에서 다섯 줄로, 다시 열 줄로 맞춰가며 서 있었다. 뜨거운 햇볕아래 아무 방비도 돼 있지 않은 피부가 빨갛게 달아올랐다. 양산을 쓰고 있는 아주머니가 부러웠다. 자원봉사자들이 생수도 주고 두유도 주었다. 신문도 받았다. 나이가 많으신 분들은 땡볕에서 기다리게 하지 않고 임시분향소로 모시고 가기도 했다. 나머지 사람들은 차분히 차례를 기다렸다. 난 같이 온 찬과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었다. 사람은 많았지만 복잡하지 않다는게 이상하게 낯설었다. 간간히 구급차가 왔다갔다 했다. 명계남 씨가 와서는 어른들에게 더운데 고생하신다, 와주셔서 감사하다고 인사를 하기도 했다.

피곤해 하실만도 한데, 말없이 주위를 정리하시던 자원봉사자 분들.


 그 날,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에서 이어폰 너머로 들리는 앵커의 목소리가 아무렇지 않았었다. 그 전까지는 손 끝에서 머물던 슬픔들이 그 목소리를 듣자 가슴까지 번져 버렸다. 집에 도착하고 TV를 켜고 인터넷을 봤다. 모두가 이 거짓말 같은 일을 거짓말처럼 사실이라고 하고 있었다. 눈꺼풀이 뜨거워졌다. 불과 어제만 해도 못 잡아 먹어서 안달이 나던 사람들이 거짓말처럼 거짓말같은 애도를 표하고 있었다. 모든 상황이 믿어지지 않았다. 믿고 싶지 않았다.

 봉하 마을이 생긴후 지금까지 살았던 사람보다 이번에 왔다간 사람이 훨씬 많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했다. 곳곳에 카메라를 든 사람들이 지나다녔고, 방송용 중계차가 줄지어 서있었다. 조선, 중앙, 동아 일보 기자들을 제외한 대한민국의 모든 언론에서는 다 와있는 것 같았다. YTN중계차 위에는 중계석이 마련되어있었다. 모두들 카메라를 들고 있거나 노트북을 두드리고 있었다.  

 일부러 오기도 힘든 이런 시골에서 살면서 등산하고 농사짓고 자전거타며 촌부로 지내고자 했던 사람을 왜 벼랑끝으로 내몰았을까. 왜 자신들 지지도 떨어지는 것을 이미 끈 떨어진 전직 대통령을 들볶아 만회하려 했을까. 다른 전직 대통령들은 가끔 정신나간 소리해도 놔두면서, 정치 관련 말은 하지도 않고 농사나 짓고 살려는 사람이 뭐가 그리 불만이었을까. 

이 다음 차례여서 기다리면서 찍은 사진. 앞사람 머리 사이로 몰래 빨리 찍은 사진. 영정을 보자 울컥했었다.


 멀리 영정이 보였다. 자원봉사자들이 국화꽃을 나눠주고 있었다. 어느새 나도 한 송이 받아들었다. 주위에 모든 이들이 국화꽃 한 송이 씩을 들고 있자니 순식간에 은은한 향이 온 공간을 가득 채웠다. 아, 이게 국화향이구나. 은은하고 또 슬픈, 그래서 차분해지는 향기. 
 
 순서를 기다리고 있는데 어디선가 훌쩍이는 소리가 났다. 내 뒤에 서 계시던 아주머니께서 눈물을 흘리시고 계셨다. 그만 울어라. 같이 오신 아저씨께서 무뚝뚝함 속에 안타까움을 감춘채 아주머니께 말씀하셨다. 곧 우리 차례가 되어 국화꽃을 헌화하고 묵념을 했다. 영정 사진은 환하게 웃고 계셨다. 눈을 감고 묵념을 하자 울컥 눈물이 날 뻔 했다. 여기저기서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이제서야 실감이 났다. 다신 이분과 악수를 나눌 수도 웃는 모습을 볼 수도 목소리를 들을 수도 없는 거구나. 이젠, 정말로 보내드려야 하나. 

 자살이 아니라 희생이라고, 일부 대통령이 자살이나 한다고 욕하는 사람들에게 말하고 싶다. 가족도 지키고 자신도 지키고 자신을 공격하던 무리들이 받아칠 수 없는 유일한 선택이자 승부수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너무 아쉽고 슬프다. 슬프다가도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아무도 원망하지 마라고 하셨지만, 원망스럽다. 떠난 사람도 떠나게 한 사람도 그저 바라보고만 있었던 사람도 다 원망스럽다. 미안해하지 마라고 하셨지만 너무나 죄송하다. 그저 지나가는 바람이겠거니, 시간이 지나면 모든게 밝혀지겠거니 했는데, 그 바람에 별이 져 버렸다.

'이명박과 뉴라이트'

'일장기 휘날리던 조선일보'


생가도 복원공사를 하다 중지된 상태였고 사저 앞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이젠 공사가 끝난다 한들...


 국밥을 먹고 사저 주변을 둘러보았다. 봉하마을에 처음 온 찬과 함께 생가를 보러 갔지만 현재는 복원 공사중이었다. 사저도 공사중으로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부엉이바위를 보러 갔다. 봉화산은 낮지만 좋은 산이었다. 부엉이바위도 원래는 경치가 좋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보고 있자니, 얼마나 아프셨을까 하는 생각만 자꾸 들었다. 마지막 순간 당신께선 어떤 생각을 하셨을까.
 

부엉이바위.


 그 날 아침엔 정말 흐렸었다. 아침 일찍 외출을 준비하는 내가 하늘을 보며 비가 올 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었다. 해가 뜨지 않은 하늘은 회색빛을 띄고 있었고, 대기엔 습기가 가득했다. 이런 날은 하루종일 짜증만 내거나, 한없이 우울해 할 날이었다. 그래서 혹시나 그 아침 바라본 하늘이, 당신의 마지막으로 봤던 그 하늘에 태양이라도 떴더라면, 당신은 다른 선택을 하셨을까 라고도 생각해본다. 그렇다면 정말 하늘이 원망스럽다. 가시는 길에 세상의 마지막 빛이라도 보셨다면. 밝은 빛을 보셨다면.

사람들이 남긴 글을 읽고 있는 사람들.

방명록 쓰는 찬.

오는 사람들과 가는 사람들. 끊이지 않았다. 혼잡하지도 않았다.


 '잊지않겠습니다' 라는 방명록을 쓰고, 왔던 길을 돌아왔다. 사람들은 방명록을 쓰고 종이에 글을 남겼고, 또 그것들을 읽고 있었다. 햇볕은 여전히 뜨거웠고 사람들도 여전히 줄지어 서있었다. 점점이 끊이지 않고 선을 이루고 선이 면을 이루고 그렇게 만들어진 면들은 움직임을 만들고 있었다. 그리고 그 사이사이에서 맑고 은은한 국화향이 번져가고 있었다. 이 향기는 곧 날아가 버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향기는 흔적을 남기고, 그 흔적엔 당신의 뜻을 새겨 언젠가는 정말로 '사람이 사는 세상'을 만들어 나갈 것이다. 그 때가 되면 당신을 다시 볼 수 있지 않을까.


 

당신이 꿈꾸신 세상, 우리가 만들어 가겠습니다. 그때 우리 다시 만나요.


집으로 가는 길에 봉하마을 상공을 선회하던 흰 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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