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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떠나보니 나를 알겠더라 - 3.월송정(越松亭)

파란선인장 2009. 2. 21. 0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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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그 사선(四仙)이 지금 다시 월송정에 온다면


 시속 60Km를 유지하면서 한적한 논밭들 옆으로 난 도로를 달렸다. 겨울이라 인적은 없었다. 이런 곳에 오면 마음이 푸근해진다고 그래서 참 좋다고 원이 말했다. 거기다 거름냄새가 은근히 날려오면 구수하니 좋다는 말도 덧붙였다. 모두들 동의하는 분위기였다. 창문을 살짝 열었다. 거름냄새가 났다. 구수하다 싶더니 이내 찐해졌다.

 "아이, 똥냄새. 원, 그만좀 싸라."

 멋들어진 평해황씨시조종택을 지나 월송정 주자창에 도착했다. 오후 2시쯤이었을 것이다. 이정도라면 성류굴과 망양정은 여유롭게 갈 수 있을것이다. 사진좀 찍고 구경하다 가면 여유로울 듯 했다. 울창한 소나무숲을 옆에 끼고 난 길을 따라 월송정에 올랐다. 역시 나름의 조사를 해온 찬이 설명을 한다.
 
 "월송정(越松亭)이 월나라에서 소나무를 가져와서 심었다고 월송정이라는 설과, 달이 소나무 위로 올라온다고 해서 월송정이라고도 하고, 신라 사선(四仙)이 노닐었다고도 하고……"

 찬이 중얼거리며 말했다. 우리는 또 놀라움을 표했다. 원은 찬이 철저하다며, 절대 찬과는 적이 되지 않겠다고 다짐을 한다. 월송정앞에 있는 안내판에 있는 설명은 찬의 설명과 거의 비슷했다. 우리 각자는 찬에게만큼은 언제나 다정하겠다고 다짐한다. 월송정으로 난 계단을 오르며 우리는 어떤 기대감을 품었다. 과연, 관동 제1경이라는 이 곳은 어떤 훌륭한 경치를 보여줄까. 그 옛날 신라 사선이 놀았다면 어떤 장관일까.

관동팔경중 제1경인 월송정. 아쉽게도 지금은 옛 풍광을 잃었다.



 월송정에 오르자마자 그 기대는 변기 물 내려가듯이 사라져 버렸다. 월송정에 올라 바다쪽으로 보니, 알수없는 공사가 한창이었다. 그렇지 않은 곳은 소나무가 울창해 바다가 잘 보이지 않았다. 실망감에 빠져 투덜대고 있었다. 그 때였다. 그분이 우리를 부른 것은.

 "야, 느그들 일로 와봐라. 저거 읽을 수 있나."

 낯선 할아버지가 우리를 부르셨다. 뭔가 싶어 봤더니, 정자위에 걸린 나무판에 적힌 한시를 가리키고 계셨다. 그리고 그것을 우리에게 읽을 수 있냐고 묻는 것이었다. 아이들은 즉각 나를 추천했다. 제길, 그놈의 전공은 이런데서만 나를 필요로 한다.

 "음. 그. 저. 흠."
 "자, 보래이. 안축의 시라."
 "아, 축자였구나."
 "그래, 계속 읽어봐라."
 "아니, 그저 축자만 기억났습니다."
 
 이런게 아는 척 하다가 개망신 당하는 건가. 할아버지는 우리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안축의 시를 읽어주셨다. 내용이 자세하게 생각나진 않는데, 그저 경치좋은데 와서 기분좋게 읊은 시였기 때문이다. 그리고나선 옆에 걸린 나머지 한시들을 설명해주신다. 우기? 기우(騎牛)?라는 호-아무튼 소를 탄다는 뜻의 호를 가진 영의정을 지내신 분이 귀향왔다가 월송정에 올라 지은 한시와 훗날 김종서(할아버지는 김종서라고 하셨는데, 이상하긴 했다. 앞에 말한 영의정은 선조시대라고 하셨는데, 김종서는 세종때 사람 아닌가. 내가 잘못 들었을 수도 있다.)가 월송정에 와서 기우의 한시의 운자를 따서 찬을 지었다고 한다. 그리고 계속해서 설명을 이어나가신다. 여전히 우리의 의사와는 무관한 설명이었다. 

문제의 그 안축의 시. 난... 축이라니까 축자가 떠올랐을 뿐이고, 딴거 아는 거라곤 안 자밖에 없고, 근데 할아버지는 해석해보라고 하실 뿐이고ㅠㅠ



 "원래 월송정이 여기 있던게 아니라, 저짝에 있었는데, 일로 옮긴거라. 중건할때 완전 콘크리트로 발라가 흉했는데, 최규하 대통령이 와서 보고는 흉하다고, 다시 지으라해가 이리 지은기라. 싹 다 나무로 해가. 이 봐라. 현판 이것도 최규하 대통령이 친필로 쓰신기라."

 약주를 한 병 하셨는지, 술냄새가 찐하게 풍겨왔다. 우리는 좀 귀찮기도 하고, 시간도 모자라서 그냥 가고 싶었지만, 어떻게 할 수는 없었다. 할아버지의 설명은 끊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설명을 듣고 있을 때 몇 명의 관광객이 왔다 갔다. 그럴때마다 속으로 '우린 이제 괜찮으니, 새로오신 저분들에게 설명해주시길.'이라며 바랐지만, 할아버지 눈에는 협조적인 우리를 쉽게 놓치고 싶진 않으셨나보다. 결국 우리도 할아버지께 이것저것 물어본다.

 "이 앞에 공사는 뭐하는 겁니까?"
 
 거기에 대한 대답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냥 공원같은 걸 조성중이라는 것 같았다. 그러면서 할아버지께선 또 다른 이야기로 넘어가신다. 바닷가에 철조망을 가르키며 거기에 대한 이야기도 들려주신다. 예전에 울진에 북한 특공대가 침투한 적이 있었다고 했다. 원래는 포항의 해병대를 공격하기 위해 남침을 한 것인데, 포항인줄 알고 상륙한 곳이 울진이었다는 것이다. 멍청한 특공대들때문에 민간인들 다 죽고, 그 후 철조망이 세워졌다고 한다. 월송정 주위엔 참호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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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국사편찬위원이었거든. 느그 대한민국 관광지 한번 다 가봐라. 관광지에 철조망 쳐놓은 데는 여밖에 없다. 내가 그래서 국방부 게시판이고 메일이고 막 써서 민원을 보냈어. 전화도 하고. 근데 이기 청와대에서 직접 명령을 안내리면 안된다카데. 거 참."

 청와대는 지금 여론조작하랴, 장기집권준비하랴 정신없습니다 라고 말하려다 이내 하지 않기로 한다. 이제 이야기 거리가 좀 떨어지셨나보다. 원이 조그맣게 투덜댔다.

 "에이, 그럼 지금 여기 월송정이 무슨 의미고. 원래 있던 자리도 아닌데."

 거기에 대해 할아버지께서는 인근 땅이 안동 김씨의 땅이라 마음대로 옮길 수가 없다고 하셨다. 오던 길에 봤던 울창한 솔밭도 안동 김씨의 땅이었다. 거기에는 누군가의 무덤이 있었다. 원과 헌은 자신이 안동 김씨가 아닌 것을 다행이라고 나중에 말했다. 왠지 안동 김씨였다면 좀 무안했을거라고. 할아버지의 설명은 계속 되었다. 원래 옮기기 전에는 월송정이 정동향이었다며, 해가 바로 정면에서 떴다고도 하셨다. 그리고 자신이 1년 365일 월송정에 오는데, 티비에서 보는 것처럼 멋진 해돋이는 1년에 5일 보면 많다고도 하셨다. 할아버지는 내 이따 저 안내판도 보면서 설명해주겠다라고 하시며 월송정 밑으로 내려갔다. 우린 그 짬에 사진도 찍고 좀 쉬었다. 원친 않았지만 설명을 들으니 흥미도 생기고 여러가지 알게 된 것도 많아져서 고맙긴 했다. 하지만 이미 시계는 4시를 넘어서고 있었다. 우린 좀 급해졌다. 할아버지께서는 안내판마저도 설명을 해주신다고 하셨지만, 그걸 듣기엔 좀 시간이 없었다. 내려가보니 할아버지가 안 보였다. 주변을 둘러보니 할아버지께서는 소변을 보고 계셨다. 아까 흥분하시며 얘기하신 그 안동 김씨의 땅에. 그때의 그 대지를 가를듯한 포스. 

 우린 안내판 설명까지 들었어야 했다. 뭐 별 수 없다고 생각했다. 안내판의 오류는 월송정 영어 안내에 월송정을 'Wol song jeong Pavilion' 이라고 표현했는데 Pavilion이라는게 붙은 것도 이상하고, 뜻 자체도 대형 천막을 뜻하는 거라 정자라는 뜻과는 맞지 않는 다는 것이다. 거기다 월송정이 고려시대때 만들어졌는데 신라 사선이 노닐다 간 것도 이상하다고 지적하셨다. 가장 인상깊은 것은 월송정 이름의 유래였는데, 우리가 아는 것은 잘못된 거라고 하셨다. 월越 자가 '넘을 월'인데 이건 옛날 신라 사선이 이곳을 지날때는 여기가 고구려 땅이었는데, 소나무 밭을 넘어서 갔다고 해서 월송정이라는 것이다. 월나라에서 소나무씨를 가져와서 심었다는 유래는 사대주의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하셨다.

 "느그 어디서 왔노?"
 "부산에서 왔습니다."
 "부산. 크. 내 옛날에 부산에서 군생활 했었는데. 남포동에서 놀고. 아, 그리고 느그 앞에 다대포에서 2명이서 자전거 타고 왔다 갔는데."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다보니 어느새 할아버지가 아주 가깝게 느껴졌다. 할아버지 성격자체가 좀 쾌활하시고 정력적이셔서 더 그랬다. 또 영어에도 능숙하고 인터넷까지 하시니, 나름 젊은 할아버지?

 떠나는 우리에게 다음에는 어디를 갈거냐고 물으셨다. 우리는 성류굴과 망양정에 갈 예정이라고 했다.

 "느그 울진 원자력 발전소에도 가봐라. 내가 거기 소장을 알거든. 가면 볼거 많다. 내가 전화해주까?"

 우린 과연 갈 시간이 있을까하면서도, 할아버지의 성의라 생각하고 일단 연락은 해달랄고 했다. 물론 우린 가지 않았다. 찬의 원자력에 대한 어떤 불안함도 있었지만, 가서 뭐 보겠냐는 생각과 더불어, 시간도 한 없이 부족했다. 주차장을 빠져나가다 또 어떤 무리 근처에 계신 할아버지를 보았다. 혹시나 월송정에 간다면, 언제든지 이 할아버지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만난다면 이야기를 들어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듣다보면 생각이 많아질 수도 있을 것이다.

 월송정이 관동 제1경의 명성에 걸맞는 곳이 되길 바라며 우린 성류굴로 향했다.


월송정
주소 경북 울진군 평해읍 월송리 362-2
설명 관동팔경의 하나로 고려시대에 창건된 고상누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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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저 할아버지는 재미있으셨습니다. 혹시나 월송정에 가시는 분들은 한 번 설명을 들으시면 시간은 많이 쓰시겠지만, 그만큼 얻어가시는 것도 많으실 겁니다. 아래는 제가 리뷰를 쓰면서 지어본 시조입니다. 저도 월송정에 올랐으니 옛 선인의 발자취를 따라보려구요. 뭐, 수준이야 한참 떨어지지만, 재미로 써봤습니다. 그러니 재미로 읽어주시길.


 월송정 올라보니 기계음만 가득하고,
 녹슨 철조망위로는 해조차 사라졌네.
 그 옛날 신선이라한 에프포는 어디에.

                                   -파란선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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