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ogcasting/우물쭈물 사는 이야기

눈이 내린 날.

파란선인장 2008. 12. 5. 1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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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눈이 내렸다.

 - 신의 실험으로 인해 상자를 열어버린 판도라를 탓할수는 없지만, 원망스럽기는 하다. '희망'이란 잔인한 것을 이 세상에 퍼트렸으니.

  밤잠을 설친 것 치고는 일찍 일어난 아침이었다. 심장이 자꾸만 요동쳐서 더 이상 잘 수는 없었다. 이미 결과는 예상하고 있었지만, 몹쓸 '희망'이라는 것은 나에게 무의미한 기대를 갖도록 부추겼다. 초조함에 1분이 10분같은 시간들이 흘렀다. 마침내 결과를 확인할 수 있었고, 예견되었던 결과는 나를 한 번 더 낙담시켰다. 확인사살이었다.

  창 밖을 보니 눈이 내리고 있었다. 내가 사는 이 반도의 남쪽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귀한 눈이 그 때 내리고 있었다. 군대를 다녀온 사람들은 눈에대한 감회가 다 사그라진다지만, 눈이 귀한 곳에서 사는 나는 제대후에도 여전히 눈을 사랑했다. 바람에 제법 굵은 눈이 날리고 있었다. 밖을 내다 봤다. 눈이 내린다고는 했지만, 쌓이지는 않았다. 눈은 지면에 닿자마자 사라져버렸다. 나의 지난 1년처럼. 흔적도 없이.

  새벽에 일을 나가시면서 아버지가 짤막하게 메모를 남기고 가셨다.
 
 '힘내라.'

  나는 하루종일 항로를 잃어버린 배처럼 무력감속에서 출렁였다. 그 속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비겁한 눈물만 글썽이는 것 뿐이었다.

  나는 다시 잉여인간이 되었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하지?라는 물음이 그 무력감속에서 더 거친 풍랑을 일으켰다.

  그래도 헤쳐나가야 한다. 나 혼자 힘으로 다시 키를 잡아야 한다. 힘들겠지만, 나에겐 나를 자랑으로 여기시는 부모님과 동생이 있다.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들도 있다. 무엇보다 나는 여전히 젊다. 그 모든 상실감과 무력감과 고됨보다 나약함이 더 끔찍한 것이다.

  눈이 떨어지고, 나도 떨어졌다.
 
  눈이 사라지듯, 이 슬픔도 사라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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